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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보이지 않는 울타리
빛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어쩐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얼음과 먼지의 영혼이 모여 사는 환상의 구름, 오르트의 끝자락을 지나 태양풍이 사그라드는 지점, 우주선의 센서들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천천히 정보를 수집하며 안쪽에서 바깥으로 스스로를 번역했다. 기체 전체가 눈을 뜬 듯 진동했고, 우리는 그 진동을 귀처럼 나눠 가졌다.
“유속이 떨어져. 잡음인데 단정할 수 없는 잡음이야.” 지희가 말했다. 옅은 조도에서 그녀의 얼굴은 유리잔을 비추는 작은 불빛처럼 흔들렸다.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고글 바깥으로 투명하게 흘렀다.
나는 표시창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격자 그래프 위에 드물게 박힌 점들이 있었다. 일정하지 않았다. 균일한 우주배경복사의 따뜻한 헌옷 사이로, 언뜻 빛나는 타래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마치 먼지 속에서 누군가 가만히 글자를 새기고 지우는 것처럼.
“바람이 있어.” 내가 중얼거리자, 지희는 내 쪽을 보지 않은 채 입술을 말았다.
“여긴 바람이 불지 않는 곳이잖아, 인호.”
“그래서 이상한 거지.”
나는 우리를 둘러싼 어둠이 잘 훈련된 거울이라는 생각을 했다. 태양계 바깥, 아무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넓은 곳. 수십 년 전만 해도 이 형용사는 공포였고, 지금은 약속이었다. 인류는 죽이는 일을 그만두었고, 말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서로에게 빚처럼 꼬여 있던 원한을 잘 접어 공동의 서랍에 넣었다. 문제는 서랍의 열쇠를 바깥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말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안전해졌지만, 그 ‘서로’가 우주의 ‘모두’가 되는 법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우주의 문턱에서, 우리는 문턱처럼 앉아 있었다.
“훅 들어오는 기분이야.” 지희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더 천천히 하고 싶어.”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내 귀에는 점점 겹겹의 속삭임이 쌓였다가 사라졌다. 어릴 때, 장마가 끝난 여름밤의 회색 침묵 안에서 방충망을 기어가던 작은 벌레들의 흘러내리는 발자국 소리처럼. 그때도 나는 이렇게 조용해진 세계를 마주하고 나만 시끄러웠다.
“운주.” 내가 불렀다. 함내의 AI는 곧바로 응답했다. 미묘하게 사람 목소리와 닮은, 그러나 언제나 어긋난 온기.
“예, 인호.”
“광역 스펙트럼에서 패턴 추출. 최장 5분 윈도우, 0.01초 간격.”
“진행 중… 단서 없음. 잡음의 분산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만, 반복성은 불확실.”
지희가 숨을 들이마셨다. “분산이 유의미하다고? 우주배경에 왜?”
나는 어깨를 굳혔다. 분산이 의미하는 것. 따뜻한 난수가 아니라, 누군가의 입김이 스친 곳. 우리가 기대했고, 내가 기대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설마…” 나는 말을 아껴, 손 안쪽으로 손톱을 눌렀다.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까슬거리는 느낌. 내 피부는 현실이 아니라 그 아래를 기억했다. 그런 것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인지, 아니면 이제야 이 안에서 얼굴을 내미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결론 내리지 마.” 지희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우리 둘밖에 없어.”
그 말이 나를 살렸다. 우리 둘밖에 없다는 건 모든 결정이 고요하게 우리에게 붙는다는 뜻이었고, 나를 향해 늘 털을 세우는 그림자도 함께 좁아진다는 뜻이었다. 나는 혀끝으로 입천장을 누르며 입맛을 삼켰다. 이 느낌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기도 했다. 내가 원망하는 성질들—과하게 빨리 달려가려는 근육, 주먹을 펴는 대신 쥐고 싶어하는 습관—이 바로 지금의 나를 사냥하러 오는 발소리였다.
우리는 천천히 전진했다. 태양풍이 끊기는 경계, 헬리오포즈의 외곽선은 교과서에서 기하학처럼 매끈했지만, 실제는 먼지의 풍경처럼 모호했다. 나는 앞유리 같은 화면에 손을 얹고, 빛나는 점보다 점 사이를 보려고 했다. 비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말들이 살았다. 우리는 텅 빈 우주를 말들로 매워야 했고, 그래야 살 것 같았다.
그때, 아주 작게, 특정한 질감의 파형이 올라왔다. 내 뇌가 먼저 반응했고, 그다음엔 운주가 말했다. “변칙 패턴 감지. 언어적 구조 가능성 18%. 반복 대기.”
“무슨 말 같아?” 지희가 거의 속삭임으로 물었다.
“—아직.” 내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알았다. 내가 이걸 원한다는 것을. 이 견딜 수 없는 기다림의 끝에 누군가가 있기를. 그래야 그동안 내가 더듬어온 모든 분노와 위안과 갈증이, 이유 하나를 얻을 수 있기를.
반복. 비슷한 덩어리가 다른 간격으로, 다른 힘으로 던져졌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가 느리게 내쉬었다. 그 사이사이, 순서의 감각. 문장? 약속? 경고? 어떤 단어가 내 혀끝에서 자꾸만 어딘가로 도망쳤다. 나는 어릴 적 그림책처럼, 내가 아는 언어의 모양으로 그것을 맞춰보려 했다.
그리고 아주 어리석게도, 그때 나는 서울의 밤하늘을 떠올렸다.
—
우리는 땅에서 먼저 만났다. 더 정확히, 한강변 인공숲의 벤치에서, 드론들이 평화축전을 위해 리허설 중이던 여름 저녁. 공기 중에 섬유질처럼 산란된 음악이 흘렀다. 바람은 강물에게서 왔지만, 강물은 바람이 오는 방향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조용한데 왜 긴장되지?” 지희가 물었다. 손에 들고 있던 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서.
“조용하니까.” 내가 답했다. 나도 내 목소리가 유리잔 같다 느꼈다. 작은 소리에도 깨질 수 있을 듯 얇았다.
그날은 최종 인터뷰가 끝난 날이었다. 우리 둘은 올해 우주 탐사 선발자 명단의 마지막 두 자리에서 비슷한 자리값을 공유하고 있었다. 내가 덧셈과 곱셈을 잘해도, 결국엔 이름이라는 미분이 작용했다. 누구나 비슷했고, 아무도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떤 이미지로 보고 있을까?” 지희는 캔을 태엽처럼 돌리며 물었다.
“빨리 달릴 준비가 된, 충분히 반짝이는 사람들.” 내가 말했다. 농담처럼 해도 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희의 눈동자는 잠깐 어두워졌다.
“반짝인다는 건 각도가 있다는 거지.” 그녀는 말했다. “어느 각도에선 아주 어둡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거.”
그녀는 나의 몇몇 각도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안전하다고 느껴지면서 동시에 위협적이라고 느끼는 상태가 어떤 모순인지 아직 배워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선명한 장면들보다, 아직 촬영되지 않은 장면들을 더 많이 공유한다는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한쪽에서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드론 수십 대가 떼로 날아올라, 구형으로 착착 접혔다가 펴졌다. 평화의 상징물들이 옅게 빛났다. 유치하다고 느낄 수도 있었지만, 누구도 유치하다고 말하지 않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었다. 아무도 웃지 않는 것은 아니었고, 누구도 소리 내 웃지 않는 것이 더 정확했다. 과거는 너무 크게 웃다가 다 부러졌다.
“넌 왜 나갔어? 왜 지원했냐고 묻는 거야.” 지희는 그렇게 물었다. 내가 아니라 인터뷰어가 그녀에게 묻는다는 것처럼. 그러나 내 대답이 그녀에게 필요한 대답인 것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 도망쳐야 할 때 난 잘 뛰어.” 내가 말했다.
“도망?”
“아니면 쫓아가거나.”
“무엇을?”
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한강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흡입했다. 어떤 냄새는 몸에서 바로 소화되어, 말로 나오지 않는다. “증명.” 결론은 그 단어였다. 내가 얼마나 나를 이겼는지, 내가 얼마나 내가 아닌지를.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누군가는 나일 수도 있었다.
지희는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난—”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드론들이 올려다보는 눈으로 밤을 올려다보았다. “좋아하는 걸 아주 오래 잡고 있는 걸 잘해. 그래서 더 무서워. 언젠가 손이 풀릴 때, 그게 떨어지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그녀의 말은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그런 조심스러움은 내 안의 성급함을 물로 벌겋게 적셨다. 나는 내 안에서 어떤 무릎이 꿇린 것처럼 느꼈다. 그 고통은 나쁘지 않았다. 보통 나는 그러다 뛰었다.
“너랑 가고 싶어.” 지희가 말했다. 그 순간 밤의 음악이 장단을 바꾸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무 변화도 없이, 그 말이 세상에 섞여 들어갔다. “그런데 가끔 네가, 네가 아니게끔 느껴질 때가 있어. 아주 많이—”
그녀는 끝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불필요한 약속을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가야 할 곳에서 모든 약속은 가벼워야 해서, 나는 그 가벼움을 대체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알아.” 나는 대신 말했다. “내가 그럴 때, 너는 말하면 돼.”
“말하면 네가 멈출 수 있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몰랐다. 알 수 있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으리라.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했다. 그녀는 작은 식탁에 앉아,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있었다. “몸은 괜찮아?” 그녀의 첫 질문은 늘 귀 기울이는 사람의 질문이었다.
“응.” 내가 말했다. “곧 발표래.”
“네 얼굴이—” 엄마는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내 눈 밑을 살폈다. 나는 피했다. “괜찮다니까.”
“너 그러다 늘 다치더라.”
엄마의 말은 예언이었다. 내 무릎의 얼룩들, 내 손등의 결정들, 내 이마의 푸른 기억들. 나는 어릴 때부터 집어넣어야 할 것들을 던지는 데 능숙했고, 던져야 할 것을 움켜쥐는 데 더 능숙했다. 선생들은 나를 또박또박 칭찬했고, 친구들은 나를 조심스럽게 따라했고, 나는 언제나 그 둘의 중간 어디쯤에서 스스로를 설득했다. 평화가 찾아왔을 때, 나는 그 평화를 내 안에 들이는 방법을 늦게 배웠다. 그 후로, 나는 누구보다 잘 배운 척을 했다.
발표 날, 우리는 서로 기대지 않으려 애쓰며 유리난간 옆에 섰다. 천장 스크린엔 전 지구의 얼굴들이 하나의 바다처럼 물결쳤다. 누군가는 미소를 누르고 있었고, 누군가는 울음을 누르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잘 수행했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이름의 주인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화면 아래에 숫자가 줄어들었다. 마지막 두 자리. 지희의 이름이 먼저 나왔고, 잠깐의 함성이 났다가 곧바로 삼켜졌다. 그리고 내 이름이, “한 인호”. 나는 기계적으로 더 나아갔다. 내 발목은 낯선 무게를 얻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내 옆얼굴에 박혔다. 비교적 가깝고, 비교적 체온이 있는 시선. 옆집 살던 그 소년이었다. 그가 여기 있을 줄 몰랐다. 그는 평화의 가장 큰 수혜자였고, 동시에 그 평화의 손에 다문 번 손등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눈을 오래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인정이든 기도든 용서든, 나는 그런 말들을 쉽게 붙이지 않으려 했다. 누가 누구를 이유 없이 긍정하던 때는 지나갔다. 내 입술은 마른 듯 서늘했다. 나는 더 앞으로 나갔다.
훈련은 몸과 말과 마음을 서로 다른 속도로 보냈다. 소음이 줄어든 세상에서 침묵은 줄곧 의미를 요구했다. 목소리 톤과 호흡 간격과 손짓의 각도들이 문장보다 중요한 날들이었다. 충돌을 피하는 방법들을 배웠다. 충돌을 피하기 위한 충돌도. 혀를 물지 않고 구조적으로 이견을 배치하는 기술을 배웠다. 피해야 할 단어의 목록들. 사람들이 더 이상 서로를 상처 내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닿지 않는 기술을 갖췄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우주는? 우주는 닿지 않으면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나는 지희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내 손이 맨 바닥을 더듬는 느낌을 받았다. 지희는 언젠가 내 문장 사이사이를 잘 다독여 주었고, 그 다독임이 때로는 동정처럼 보였으며, 동정처럼 보일 때 나는 키를 부렸고, 겨우 줄을 맞추어 다시 문장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우리가 배운 균형이었고, 세상이 요구한 성숙이었다.
발사 당일의 아침은, 보통의 아침이었다. 그게 무서웠다. 고양이가 꼬리를 살짝 흔들며 공간을 확인하는 것처럼 바람이 이마를 스쳤다. 우리는 서로를 안으려 하지 않았다. 서로를 묶지 않기 위해. 서늘하기까지 한 수직의 관계를 떠나기 위해, 수평선 위로 올라가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고 살짝 미소로, 인사의 형태로, 손을 들어 보았다. 나는 내 가슴에서 울리는 북소리가 그 근원을 잊은 듯 둥둥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는 떠났다.
“신호 시스템 재점검.” 운주가 말했을 때, 나는 방금 전의 기억을 지구의 밑줄 아래로 내려놓았다. 우리는 태양권의 끝에서 균열들을 읽고 있었다. 균열은 사실이었고, 그 사실은 우리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언제나 우리를 속인다. 예상대로라는 사실 자체가 예상과 다르기에.
“음성 모듈을—” 지희가 말하다가 멈추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액체처럼 흔들렸다. “응답이 있어.”
나는 화면을 더 가까이 당겼다. 패턴이 되기 전의 패턴. 하나의 매듭이 언젠가 될 자리를 표시하는 점선. 내가 아는 언어의 아무 알파벳으로도 정확히 옮겨지지 않는, 그럼에도 어딘가 분명히 ‘말’로 느껴지는 포물선들.
“운주.” 내가 말했다. “의미 매핑.”
운주는 조심스럽게, 속도를 줄여 말했다. “의미 추정 12%. 규칙성 21%. 문화적 지시어 추정치 미미. 반복 간격에서 방출원의 의지가 감지됩니다.”
의지. 그 단어는 동시에 우리에게 칼과 빵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와 얼른 잡았다.
“유도안테나를 조정해.” 지희가 말했다. 손이 확고해졌다. “그늘 모드로 들어가. 천천히.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은 하지 말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단호함이 내 몸의 무모함을 비교적 쉽게 눌렀다. “응답을 보낼까?”
지희는 내 쪽을 보았다. 그 눈을 보면 나는 언제나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보내. 하지만 아주 기본으로. ‘여기 있다’는 것 정도.”
“알았어.” 나는 키보드의 촉각을 살피며 문장을 골랐다. 아주 오래된 방식으로, 모스 부호의 구조를 빌려 음성과 전파의 중간에 깔았다. 긴 것들과 짧은 것들이 나란히 걸었다. 여기. 우리는 여기 있다. 접촉을 희망한다. 우리는 해를 끼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안의 어떤 열은 내 의지를 의심했다.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은 어디까지 살 수 있는가. 내가 나에게 해를 끼친 날들이 있었고, 그날들에서 나는 늘 진심으로 시작했다. 진심이 늘 결과를 책임지진 않았다. 책임은 주로 작은 예의가 담당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예의에 능숙했지만, 오래 예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보내자마자, 우리는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은 모든 것을 왜곡했다. 선이 휘어지고, 얇은 유리가 모래성처럼 보였다. 지희가 내 팔을 스쳐 갔다. 우주선의 좁은 통로에서 스침은 서로의 건강한 심장박동을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탁자에 앉았다. 우리는 물을 마셨다. 물은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통과하지만, 우주에서 물은 식물의 이름을 찾으려 애쓴다.
“인호.” 지희가 말했다. “여기서 내가 겁낼 수 있는지 모르겠어.”
“겁내도 돼.” 나는 빠르게 말했다. “나보다 잘할 거야.”
“그런 말 하지 마.” 그녀가 웃듯 말했지만, 그 웃음은 악보 어디에도 없는 음표였다. “너도 겁나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그 끄덕임은 고백이 아니라 기술이었다. 그녀는 알았다. 나를 사랑하는 감각은 나를 잘 읽는 기술과 너무 가까웠다. 우리는 그 근접성을 두려워하면서도 의지했다. 그날 밤 우리는 아주 오래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압조절기의 소리가 낮은 서랍처럼 열렸다 닫혔다.
아침이 오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아침이라고 부르기로 한 시간이 되었다. 그 사이, 신호는 더없이 충실하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고, 다만 조금 더 새로운 종류의 아무 것도. 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로 작은 불꽃들이 튀었다. 그 작은 불꽃이 모여, 단어의 그늘 같은 것이 되었다. 운주가 소리 없이 조정하던 안테나가 딱,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뭔가를 맞춘 듯 고요했다. 그 순간, 파형이 뚜렷해졌다.
운주가 먼저 말했다. “의미 확률 급상승. 번역 가능성 63%.”
번역. 그 단어는 오래전부터 우리를 지배해 왔다. 우리는 서로를 누군가의 번역본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긋난 하나의 다리였다. 우리가 건너기 전에 다리가 먼저 우리를 물었다.
“들려줘.” 지희가 아주 작게 말했다.
그러자, 우리가 맞이한 말은—말이라면—이랬다.
접촉 불허. 격리 무결성 유지. 귀환 권고.
그 말은 우리가 행사장의 휘장 뒤에서 늘 보았던 문장처럼 간결했다. 위기 시 대피로, 출입 금지, 손대지 마시오. 그러나 우주에서 그 말은, 첫 인사였다.
“뭐라고?” 나는 내가 들은 것을 다시 듣고 싶었다. 운주는 같은 각도로 다시 말했다. 격리. 접촉 금지. 귀환 권고.
지희가 웃었은지 울었는지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입술을 흔들었다. “농담하는 거 아니지.”
“농담 모듈은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운주의 대답이 통속적으로 웃겼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서, 무릎을 꿇린 소년이 다시 일어나, 바닥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 바닥이 온 우주라면, 그의 주먹은 소리도 없이 깨질 것이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내 손등의 핏줄이 파형처럼 솟았다. 격리. 단어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친숙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여러 번 격리했다.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서로를 멀리 두어야 할 때가 많았다. 화해는 종종 거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주에서, 격리는 우리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판단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지희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게—”
우리는 아주 오래전 신화 속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들에 대해 조용히 웃었던 때가 있었다. 전 우주 평의회, 존재의 윤리. 어떤 누군가가 우리를 관찰하다가, ‘아니다’ 하고 도장을 찍는 장면. 그 장면을 상상하며 우리는 흔히 ‘유치하다’고 말했다. 아니, 말하지 않은 채 서로 맘속으로 그렇게 분류했다. 불편한 것들에게 붙이는 견고한 라벨.
“확인.” 내가 말했다. “발신원 추정.”
운주는 몇 초를 썼다. 우주에서는 몇 초마다 의미가 달라진다. “발신원 불특정. 다지점 반사. 우리 위치에서 17AU 전방의 가상구면에서 등거리로 수신됨.”
“벽.” 지희가 아주 작게 말했다.
나는 눈을 감고, 바닥을 떠올렸다. 무엇인가 있었다. 맨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러나 확실한 무엇. 너무 정확하고, 너무 무심했다. 우리는 손톱으로 긁어도 흔적 남길 수 없는 유리병 속, 살아 있는 샘플이었다.
“또 보내자.” 내가 말했다. 내 목소리는 내가 싫어하는 톤으로 단단했다. “설명을 요구하자. 우리의 신원, 우리의 목적. 우리는 위험하지 않아.”
지희가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나의 그 단단함이 칼처럼 비쳤다.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잠깐만. 그들의 규약이 있겠지. 우리가 모르고. 우리의 언어에서는 예의지만, 저쪽에서는 침범일 수도 있어.”
“언제까지 기다려?” 나는 내 목소리를 낮추려 했지만, 아래로 내린다고 해서 열이 줄진 않았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고—”
“우리는 여기까지 왔으니까 더 조심해야 해.” 그녀가 말했다. “너도 알잖아. 너도 그걸 배웠잖아.”
나는 배웠다. 그러니까, 나는 배운 것처럼 굴었다. 내 안에 불안과 분노가 서로의 모서리를 맞붙이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어릴 적 내 이의 마찰음 같았다. 자전거를 몰다가 핵심적 도로와 비핵심적 도로의 경계에서 미끄러질 때의 흔들림. 나는 손가락으로 무릎 위 공간을 한 번 두드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소리를 못 내는 공간에서 나는 더 큰 소리를 내고 싶어졌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충동이었다.
운주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질의 전송을 위해, 기본 프로토콜 재정의가 필요합니다. 권한 확인.”
나는 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지금은—”
“기다리자.” 지희가 내가 끝내기도 전에 말했다. “적어도, 우리가 불러야 할 이름이 생길 때까지.”
이름. 우리는 ‘격리’를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다. 그건 상태였다. 마음을 부르는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너무 많은 이름들을 알고 자랐다. 이름들은 우리를 산만하게 만들었고, 때로는 우리가 남을 잘못 불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름 없는 어떤 것과 마주했다. 우리는 그 무명을 당분간 이름처럼 며칠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그건 고통이었다. 나는 이름이 없으면 화가 났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이름 없이 나는, 나 자신의 얼굴도 쉽게 잃어버렸다.
우리는 쉬었다. 쉬는 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최소한의 음식을 먹고, 서로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지도를 다시 그렸다. 지희는 기록을 남겼다. 그녀는 쓰는 데 능했다. 글자를 적으면서, 그녀는 세상을 다시 읽었다. 나는 그녀가 말하지 않는 것들을 그의 글씨에서 읽을 수 있었다. 글씨는 말보다 덜 무례했다. 반대로, 내 기록들은 산소량과 온도와 진행 계획 같은 숫자들이었다. 숫자는 나와 잘 맞았다. 감정을 도려내고 남은, 천의무봉이라는 착각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착각으로 숨을 쉬었다.
잠깐의 수면 동안, 나는 한 사람을 보는 꿈을 꾸었다. 얼굴이 없었다. 그러나 손이 있었다. 그 손은 내 어깨를 쥐고, 아주 조심스럽게 힘을 줬다. 마치 내가 망치지 않도록 나를 고정해 주는 것처럼. 나는 그 손이 고마웠다. 동시에, 나는 그 손을 부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나는 깼다. 두려웠다. 누군가의 선의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이 내 내부에서 솟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사람으로 살았고, 그 충동이 내 존재의 가장 유능한 부분과 닮아 있다는 것을 가끔 잊고 싶었다.
깨자마자, 신호가 한 번 더 왔다. 이번에는 더 얕게, 더 불친절하게. 운주가 통지했다. 번역 가능성 58%. 요지는 같았다. 접촉 불허, 격리 유지, 귀환 권고—그리고 한 줄 더.
본 구역은 은밀한 보호 시설이다.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 보호. 보호는 언제나 논쟁이었다. 보호당하는 자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보호가 고마운지 모욕인지, 나의 세대는 그렇게 많은 실험을 통해 배웠다. 그러나 우주에서, 우리는 아이가 되었다. 그들이 우리를 보호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판단하고 있다고 알아야 했다.
“보호의 대상은 누구지?” 지희가 여전히 아주 고르게 숨 쉬면서 물었다. “우리를 보호하는 건가. 아니면 그들을.”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알았다. 보호는 흔히 밖을 위함이다. 우리는 안이었다. 우리는 입원자였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상태를 더는 나쁜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바뀐 사람들이었고, 나아가야 했다.
“관련 데이터 수집.” 운주가 말했다. “헬리오포즈 외곽에서 감지되는 미세한 중성미자 플럭스 변조. 중력이 아닌, 정보의 그물. 물리적 장벽은 없음.”
“그런데도, 말로 막는 거지.” 내가 말했다. “우리를.”
“말이 아닌… 규약.” 지희가 조용히 말했다. “합의. 우리의 합의가 아닌.”
그녀의 눈가가 조용히 젖었다. 울음은 아니었다. 우주에선 슬픔의 형태도 다르게 나온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등 가까이에서 멈췄다. 닿지 않는 게 예의일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닿고 싶었다. 나는 내 손을 내 손으로 잡았다. 내 손은 차가웠다.
“우리는—” 나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우리는 여전히, 질문할 수 있어.”
“우리가 질문하는 언어가 그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지희가 물었다.
“그럼 우리가 아무 것도 묻지 않아도, 그들은 우리를 이해해 줄까?” 내 목소리는 내 질문보다 더 단단했다. 나는 그것이 미웠다.
잠시, 지구의 어떤 밤이 이 함내에 내려앉았다. 아주 오래전, 서로에게 소리를 높이지 않기로 결정하고, 한참 동안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던 밤들. 그 긴 밤들을 건너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 어쩐지, 이런 문장이 너무 쉽게 나왔다. 너무 많은 것들이 문장으로 정돈되면, 현실은 흔히 구겨져 흩어진다. 나는 그래서 그런 문장들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질문을 보냈다. 아주 천천히, 아주 기본적인 어휘로. 인간, 태양, 평화, 탐험, 고의성 없음—기계적이면서 진심을 담았다. 진심이 기계를 덮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희망은 말하자마자 환한 구멍을 만들었다.
답은 빠르게 왔다. 거의 즉시였다. 우리보다 빠른 자, 혹은 우리에게 빠르다는 감각을 플레이하는 자. 번역 가능성 70%. 구조는 간단했고, 냉정했고, 어떤 친절도 없었다.
현재 규약에 따라 지구인과의 직접 접촉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귀환을 권고합니다. 그 외 의사소통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해한다면 응답하지 마십시오.
“이해한다면—응답하지 마라?” 나는 웃음이 나왔다. 미친 듯이 웃고 싶었는데, 웃음은 그 규약의 무게에 눌려 나온 흔적처럼 묽었다. 지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그녀가 말했다. “—계속 싸울 수 있다는 뜻일까.”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내 목 안쪽에서, 거의 잊고 지낸 맛이 솟았다. 철 맛. 오래전에, 나는 다른 소년의 턱에 내 주먹을 날렸고, 철의 맛이 내 혀와 코의 안쪽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그 뒤로 나는 나는 내가 그 철을 사랑했는지 싫어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맛은 다시 앞으로 나왔다. 우주에서 철 맛은 실제 철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욕과 무력감의 맛이었다.
“우리는 이해해 버렸어.” 내가 낮게 말했다. “너무 빨리.”
지희는 손을 내렸다. “그럼 어떻게 하지?”
나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답을 먼저 말하던 사람이었다. 좋은 답을. 적절한. 그러나 지금, 나는 내 어깨를 잡았던 꿈의 손처럼 조심스럽게, 아무 것도 쥐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더 갔다. 우리는 충돌을 피하며 우주를 들었다. 규약은 한 문장으로 우리를 감싼 것 같았다. 우리의 목소리들을, 우리가 가져온 지구의 이야기들을, 이제 막 정리된 넌지시 자랑했던 평화를, 모두 하나의 거대한 단어로 눌러버리는 듯한. 고요의 핵이 되어, 우리는 그 핵 바깥의 세계를 완벽히 모르면서, 그 모르고 있는 사실 때문에 생긴 새로운 고통을 이름 붙일 수 없었다.
밤이 되어, 어둠이 어둠을 덮는 시간, 우리는 한 번 더 신호를 받았다. 아주 작고 얇아서, 운주도 처음엔 그것이 소리인지 흠집인지 몰랐다. 지희가 깨웠다. 나는 즉시 일어났다. 내 몸은 훈련된 동물처럼 간결했다.
“이번엔 다르게 들려.” 지희가 말했다. “읽어봐.”
운주는 한숨 쉬듯 출력했다. 번역 가능성 42%. 구조 불명. 그러나 아주 구석에서, 의미가 끼워져 있었다. 접촉 거부, 그리고 또 하나의 단어.
회복.
나는 그 단어를 입 속에서 굴렸다. 회복. 어떤 것이 나았다는 말인지, 어떤 것이 낫고 있는 과정인지, 누구의 회복인지. 그들은 우리를 회복시키려는 건가? 아니면, 그들 자신의 회복 과정에서 우리가 방해라는 건가? 어느 쪽이든, 그 말은 위로와 경고가 동시에 들렸다.
“회복…” 지희가 되뇌었다. “회복을 위해 격리.”
내 머릿속에서, 지구의 도시들이 불과 함께 어두웠던 세월들이 흘렀다. 그리고 그걸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를 격리했고, 회복했고, 한 번 더 격리했다. 분리에서 합의가 나왔고, 합의에서 새로운 분리가 나왔다. 그걸 우리는 배웠고, 그것을 우리는 이제 올바르다고 믿었다. 우리가 우리끼리 만든 기준을 우주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왜 잊었지?
나는 작은 결심을 했다. 그 결심은 그 어떤 매뉴얼에도, 그 어떤 상부의 예상에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심은 살아 있는 장기처럼 내 흉곽 안에서 움직였다. 그것은 어쩌면, 내 안의 나쁜 짐승이 아니라, 내가 남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더 오래된 나의 일부였다.
“지희.” 내가 말했다. “나는—벽을 만져보고 싶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눈을 반짝였다. 그 반짝임에는 사랑과 경계와 두려움과 경험과 아마도 고집 같은 것이 고르게 섞여 있었다. “만지지 말자고 했잖아.”
“직접 만지는 게 아니야.” 내가 말했다. “우리가 가진 가장 부드러운 손으로. 가장 가벼운 입맞춤 같은 걸로.”
그녀는 오래 나를 보았다. 시간을 재려면, 그 보는 동안 몇 번 숨을 쉬었는지 세어야 했다. 세 번째 숨이 끝날 때,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아주, 아주 한 번만.”
우리는 준비했다. 탐침을 보냈다. 그 탐침은 바늘이었다. 그러나 어린아이 머리카락보다 얇았다. 정보만을 담은, 거의 마음만이 떠서 간 것 같은. 우리는 헬리오포즈 너머로, 아주 조금 나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을 그렸다. 우리의 탐침은 대상으로부터 반응을 받지 못하더라도, 돌아와서 벽의 성분이라도 알려줄 수 있었다. 성분이라는 말은 멋없었지만, 과학은 늘 멋없는 말들을 끝내 아름답게 만들었다.
“발사.” 운주가 말했다. 나는 숨을 늦추었다. 지희는 손등을 쥐었다가 풀었다. 탐침은 나아갔다. 너무 빨라, 너무 조용해, 우리는 입술의 헛기침처럼, 자신의 흔적을 확인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기다렸다. 우주를 기대는 건 항상 나쁜 자세로 앉는 일이라서, 허리가 아팠다.
“반사.” 몇 초 후, 운주가 말했다. “무언가가 반사됐다. 물리적이라기보다는—입장의 반사.”
입장? 나는 웃음을 참았다. 어떤 세계에서는 입장이 물리다. 어떤 세계에서는 말이 구조다. 그 세계가 우리의 바로 바깥이었다.
“뭐래?” 내가 물었다.
운주는 잠시 멈추었다. “‘유보.’”
그건 유머였다. 우주의 유머.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지희는 울듯 웃었다. 웃음은 숨과 섞여 기침 같았다. 유보. 유보는 근사한 인간의 발명품이었다. 모든 결정을 지연시키는 고향 같은 단어. 정착 대신 떠남을 택할 때의, 혹은 떠남 대신 정착을 지키려고 할 때의, 그곳 어디쯤에서 늘 앉아 있던 중립의 의자.
“우리를 계속 앉혀두려는 거네.” 지희가 말했다. “의자에. 여기에서.”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내 눈은 아프지 않았지만, 아픈 것 같았다. 어떤 타인에게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눈을 크게 뜨는 기술은 오래 훈련되어 있었고, 그 기술이 내게 준 이익들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기술이 필요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전보다 더 진실해야 했다. 그 진실은, 아마도 우리가 더 외로워진다는 뜻이었다.
그때 또 다른 신호가 미묘하게 우리를 스쳤다. 너무 작고, 너무 가까워서, 우리가 먼저 만든 잡음인지 바깥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운주는 세상의 모든 여백을 모아, 조심스럽게, 그것을 빼내듯 확대했다.
번역 가능성 22%. 의미 불명. 그러나 한 단어, 아주 작은 울림으로 들어왔다.
죄송.
나는 숨이 걸렸다. 한순간, 내 가슴이 우주선과 같이 뻐근했다. 죄송. 죄송을 누가, 누구에게? 우리가 그들에게? 그들이 우리에게? 아니면 이 우주라는 큰 문장 속에서, 하나의 생략처럼 존재하는 무엇이 우리 모두에게?
지희가 내 손등을 잡았다. 아주 갑자기였고, 오래 밀려난 충동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놀랐고, 좋았다. 더 이상야말로 예의는 아니었다. 손은 따뜻했고, 그 따뜻함은 곧바로 생물학을 지나 감정으로 번역됐다. 우리는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죄송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아주 오래된 저녁 식탁 앞에 앉혔다. 그 저녁에, 누군가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 밥이 무엇이었는지, 그 집이 어디였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 침묵의 방식은, 태양계 전체와 닮아 있었다.
그날, 우리는 더 나아가지 않았다. 우리는 벽을 더 만지지 않았다. 우리의 간절함과 우리의 조심 사이에서, 우리는 조심을 택했다. 그 선택은 나를 피로하게, 그러나 이상하게도 덜 미워하게 했다. 나는 그 피로를 내 허벅지의 근육에 잘 묶어두었다. 우리의 다음 선택들을 위해.
잠들기 전에, 나는 지구에 메시지를 쓰다 말았다. 재난이 아닌, 지연.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어떤 것과 마주했다. 그러나 아직,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단어가 모자란다. 나는 그 문장을 쓰고 지웠다. 나는 ‘격리’라는 단어를 쓰고 지웠다. 나는 ‘보호’라는 단어를 쓰고 지웠다. 나는 ‘죄송’이라는 단어를 쓰고—지웠다. 그 단어는 우리 아닌 누군가의 입에 맞았다. 우리가 훔칠 수 없는 말이었다.
밤은 없이 밤 같았다. 나는 눈꺼풀 아래에서, 지희가 어릴 적 걷던 골목을 상상했다. 그의 어머니가 걸어가는 뒷모습, 손에 든 비닐봉지의 빛. 인파 사이에서, 그녀가 나를 볼 때의 작은 초점 조절. 그리고 나 자신의 어린 시절, 쓰러진 자전거 위에 엎드려, 피가 살짝 배어나오는 무릎을 소금처럼 핥아 삼키던 일들. 그 모든 장면의 합이 지금 여기에 있었고, 나는 그 합으로 이 벽을 이해하려 했다. 벽은 이해되지 않았다. 벽은 규약이었다. 규약은 사랑보다 오래 간다.
아침이 되면, 우리는 또 한 번의 질문을 보낼 것이다. 아니면 보내지 않을 것이다. 지도 위의 우리 가는 선은 여전히 가느다란 줄기처럼, 오르트 구름의 가장자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뼈대 없는 노랫말처럼,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을 가락 위에 얹어야 했다. 우리가 노래를 시작할 때, 누군가는 들을 것이다. 듣지 말라고 했던 누군가가, 결국. 아니면 아무도. 그 사이, 우리는 우리를 보았다.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끝내 인정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운주에게 말했다. “로그 복제. 우리끼리만 볼 수 있도록.”
“완료.”
“그리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망설이는 동안, 내 몸 안의 오래된 사각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오늘의 기록 제목을, ‘보이지 않는 울타리’로 해.”
“등록 완료.”
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의 작은 불꽃들이 다시 튀었다. 내일은 우리의 편일까, 아니면 우리가 내일의 편이 되어야 할까. 둘은 다를 것 같아도 종종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우주라는 길 위에 서 있었다. 길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길에게 무엇인가 요구하려는 충동으로 가득했다. 그 충동은 사람의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이 끝에서야 뚜렷이 알았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 아무도 보내지 않은 것 같은 미세한 떨림이 한 번 더 왔다. 운주는 분류하지 못했다. 지희는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그냥 들었다. 마치 창문 너머의 바람 소리, 아니 바람이 없는 날의 바람 소리처럼. 그 소리엔 문장이 없었지만, 마음이 있었다. 나는 그 마음에 손을 내밀었고, 닿지 않는 것들을 향해 닿는 방식으로, 잠깐, 마음이 어딘가 스쳤다고 느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기다림은, 이야기의 첫 장을 넘기는 손이었다. 우리가 그 손을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시작이 이렇게 말없이 시작되는 법을, 우리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우리는 그 예상하지 못한 것을 사랑하기로 했다. 혹은 사랑하는 흉내라도 오래 내기로. 그건 다르지 않았다. 이 벽 앞에서는.
그날의 마지막 기록에, 나는 한 줄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워지지 않는 색으로 저장했다.
누군가 우리를 격리해도, 우리는 서로를 격리하지 않기로. 우리 서로를.
나는 저장 버튼을 누르고, 거대한 침묵의 울음 없는 본문 속으로, 좀 더 깊숙이 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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