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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붉은 먼지 위의 푸른 약속
모래폭풍이 잠잠해진 새벽, 거대한 돔 위로 여명이 흘렀다. 붉은 먼지에 씻긴 하늘은 아주 옅은 보랏빛을 띄고 있었다. 돔의 표면에 맺힌 얼음 알갱이들이 미세한 파동을 따라 반짝였다. 라거 크레이터의 턱수염 같은 절벽 너머로 태양이 미끄러져 올라오자, 공간 전체가 한 순간 유리 종처럼 딸깍 울린다. 그 소리에, 기연은 잠에서 눈을 떴다.
그는 한동안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좁은 선실의 알루미늄 합금 벽, 손때 묻은 체크리스트, 과열로 반쯤 타버린 납땜 팁. 어떤 것 하나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전 꿈은 낯설지 않으면서도 기묘했다. 꿈속에서 그는 바다를 보았다. 고향의 겨울 바다가 아니다. 식민 항구의 부두에 쳐박힌 암갈색 물도 아니었다. 머나먼 청록의 바다, 붉은 먼지 언덕이 바로 그 모래사장이었던 곳에, 갑자기 물이 차오르고 물결이 갈대밭을 쓰다듬듯 돔을 넘어가려 했다. 그리고 바다 위로 갈매기가 단정하게 헤엄치는 듯 비상했다. 꿈에서 그는 그 새를 “갈메”라고 불렀다. 그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아득한 향수가 심장 깊숙이 젖어드는 듯 했던 것이다.
“갈메…” 그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그 말은 오래전 그들의 어머니가 쓰던 옛말이었다. 젊었을 적 어머니는 섬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웅크린 바위와 드센 파도, 소금 냄새와 웃음소리가 늘 섞여왔던 삶. 어머니는 가끔 저녁밥을 덥히며, 리듬을 타듯 그 단어를 흘렸다. “갈메들이 낮게 돈다. 내일 비 오겠다.” 그 말은 예언 같았고, 사랑 같았으며, 해수면에 비친 노을빛 같았다. 기연은 그 말이 좋아서, 자신과 동식이 함께 만든 작은 탐사선에 그 이름을 붙였다. 갈메의 꿈. 바다를 건너는 새가 언젠가 붉은 사막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형, 또 그 표정이네.” 문이 기계적으로 밀리며 동식이 들어왔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인데도 목소리에는 특유의 명랑함이 얹혀 있었다. “꿈 꿨어? 엄마 얘기하는 표정.”
기연은 탁 웃었다. “역시 넌 내 표정을 너무 잘 알아.”
“아무렴. 어제 저녁에 미역국 끓였잖아. 그런 날에는 꼭 바다 꿈 꾸더라.” 동식은 머리를 긁적이며 좁은 선실에 기대 섰다. 그의 눈동자는 늘 움직임을 간질이며 주변을 스캔했다. 파일럿의 눈이었다. “자, 그 바다 꿈 덕분에 오늘 할 일이 산더미야. 하드돔 4의 산소비율 조정, 정착민 애들 로봇 키트 수업, 그리고 오후엔 갈메를 타고 폴라 아이스 캐비닛 점검. 아, 그리고…”
“그리고가 제일 중요하지.” 기연은 막혀 있던 숨을 푹 내쉬듯 말을 이었다. “정착구역 뒤편 도랑. 지열 루프 연결해야 한다. 밤만 되면 애들 숙소가 너무 추워.”
동식이 엄지를 척 들었다. “형은 과학자인 동시에 동네 반장이지. 우리 갈메의 안전 점검은 내가 맡을게. 비행기 흉내는 나 없이는 아무도 못 내니까.”
“하루라도 비행기 흉내를 안 내면 손에 가시가 돋지?” 기연이 툭 던지며 웃음지었다. 서로의 역할은 물처럼 분명했다. 형은 계산과 재료, 구조와 생태 시스템을 믿었고, 동생은 공기와 속도, 리듬과 용기를 믿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똑같은 방향이 있었다. 사람. 이 거칠고 요란한 개척의 민낯 속에서 사람들을 더 안전하게, 더 따뜻하게 살게 하는 일. 그들의 가슴이 불타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갈메 기지의 아침은 늘 같지 않게 분주했다. 식민지 주거 구역을 감싼 거대한 돔들은 하나의 장미처럼 배열되어 있었다. 먼지 빛의 꽃잎들 사이로 사람들은 흘러다녔다. 재봉틀을 쥔 손, 힘줄이 도드라진 팔, 웃음과 욕과 수스런 노랫소리가 얽혀 있었다. 비상용 라텍스 장갑을 끼고 무거운 판넬을 들어 올리는 노인도, 삐걱대는 바퀴 달린 상자에서 3D 프린터로 나사를 뽑아내는 소녀도 있었다. 기연과 동식은 그들 사이를 자연스레 오갔다. 여느 날처럼,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기연 박사!” 유기농 식물 돔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은 여인이었다. 이름은 실라. 이주 3년 차. “장미박하가 다 죽어가요. 수분이 너무 빠르게 날아가요.”
기연은 다가가 엔도스코프처럼 생긴 센서를 땅에 끼워 넣고, 작은 화면에 그래프들을 띄웠다. “흙의 컬럼 구조가 깨졌어요. 지난 폭풍 때 미세먼지가 너무 많이 유입된 듯. 오래된 스펀지를 새 것으로 바꾸는 셈으로, 펄라이트 레이어를 한 층 더 올려요. 수분 유지력 회복될 거예요.”
“그거… 구할 수 있어요?”
“출력해서 가져다 줄게요. 우리가 만들면 되지.” 기연은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실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표정에 떠다니던 긴장감이 순간 불어서 조그만 파동처럼 펴졌다가 사라졌다. 기연은 그런 잔물결을 사랑했다. 컨트롤 패널의 숫자보다도 사랑했다. 숫자는 늘 진실을 보여주지만, 진실이 되고 싶은 숫자도 있으니까.
동식은 아이들 몇 명을 데리고 작은 작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로봇 키트에서 팔같이 작은 모터가 몇 개 너부러져 있었다. “자, 전원 라인은 빨간 녀석. 접지는 검은 녀석. 절대 바꾸지 않기.” 그는 노래하듯 말했다. “그리고 아무리 급해도, 나사 하나하나를 천천히, 요정에게 부탁하듯 돌려야 해. 기계엔 존중을.”
“요정은 전혀 기계 같지 않은데요.”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기계를 요정처럼 대해주자고.” 동식이 윙크했다. “그럼 얘네도 우리를 잘 대해줘.”
그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있을 때, 전체 통신망에서 퉁 하는 저음이 울렸다. 관제의 목소리가 공간을 스쳤다. “모든 도메스틱 유닛 주의. 궤도상에서 비정상 플라즈마 흔들림 포착. 통신 간섭 가능성 있음. 긴급 준비 절차를 가동 바랍니다.”
사람들이 흠칫하는 게 보였다. 마치 갑자기 무대의 조명이 조금 어두워진 느낌. 누군가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리듯 하늘이 미세하게 잡음처럼 갈라졌다. 기연은 즉시 허리춤의 링크 디바이스를 눌러 관제 채널에 접속했다. “기연 수신. 위치 하드돔 4. 기지, 세부 보고 요청.”
“라우드에이전트 관제.” 기계적이지만 익숙한 미음. “위성망 레이더에서 이전에 기록되지 않은 벡터의 편광 빔 포착. 패턴 불분명. 동력 기원 미상. 플라즈마 채널이 우리 쪽으로 유도되는 징후. 통신 상태 불안정 우려.”
동식은 귀에 손을 대며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그의 얼굴에 순간적 농담기가 사라졌다. “형.”
“알아.” 기연은 한 손으로 실라에게 눈짓했다. “모든 비농업군이 수문을 닫고, 실란트 자동 분사 장치 가동. 사람들 안내할게. 동식, 너는 갈메를 준비해. 비상 탈출용은 아닌데… 그래도 혹시 모르지.”
“빚 갚을 시간이구나.” 동식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이들, 오늘 작업은 여기까지. 너희 로봇은 내일 더 잘 움직이게 될 거야. 아주 훌륭해. 이제 선생님 말대로 안전구역으로 가. 알았지?”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동식은 제거를 바짝 세우듯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들을 줄줄이 묶어 출구로 보냈다. 아이들 사이에서 젖은 눈은 늘 가장 큰 힘을 갖고 있었다. 그 힘에 주눅 들지 않는 어른이 되기 위해 그들은 오래 연습했다.
기연과 동식은 각자의 걸음 속도로 분주히 움직였다. 동식은 가벼운 몸 놀림으로 곁길을 선택했고, 기연은 큰 원을 그리듯 중심을 향했다. 사람들은 말 없이도 그들을 신뢰했다. 그 신뢰는 단지 그들이 자주 웃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함께 있어야 할 때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힌 환경 조절 밸브를 밤새워 뚫고, 고장 난 물분자를 추출하는 펌프를 한 조각씩 분해해 닦고, 무너진 가벽 아래 깔린 개와 함께 숨 막혀 울기를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공기가 미묘하게 철 냄새를 풍겼다. 먼지 말고, 기체의 표식. 뇌가 먼저 감지했다. 기연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늘, 아니 돔 바깥의 하늘이 흔들렸다. 투명한 실크 천으로 덮은 듯한 공간의 초점이 하나로 모였다. 그것은 마치 먼 바다에서 무언가가 고래가 숨을 내쉬는 것 같은 이미지였다. 포말이 없는 파도. 그 순간, 모래 언덕들이 빗금처럼 서서히 떨기 시작했다.
“모든 유닛, 충격 파에 대비.” 관제. “실내 기압 분산 모드 작동. 제로베이스 준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자들이 노래했다. 틱, 탁, 침묵, 그리고 무음 속에서 비명. 돔의 외벽을 따라 번개 같은 무늬가 번졌다. 공중에서 어떤 쇳빛 무언가가 거울처럼 펼쳐졌다 접혔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조용함으로, 첫 번째 충격이 돔을 강타했다.
소리 없이 유리가 울고, 고무 가스켓이 쑤욱 밀려나며, 접착제가 깊은 잠에서 고개를 들었다. 오직 몸이 충격파를 기억했다. 기연은 사람들을 필로겐 터널로 몰아넣으며, 자신의 숨이 조심스럽게 들락날락하는 것을 느꼈다. “이쪽! 서두르지 말고, 서로의 손을 잡고!” 그는 바닥의 흰 선을 따라feet을 움직였다.
동식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 “갈메 준비 완료. 접속 포트 B-17 열린다. 형, 너 없이는 출발 안 해. 알지?”
“알아. 아이들 다 보냈어?” 기연이 물었다. 두 번째 충격이 지나갔다. 더 가까웠다. 돔 외벽의 프레임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마지막 줄 도착 중. 삼 분. 그리고 우리 애들 중 한 명… 아니 두 명? 아니 잠깐, 모두 라인플로에 있어. 문제 없어.” 동식의 말은 늘 다층적으로 흘렀다. 그의 마음이 여러 창을 동시에 열어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창들은 하나의 방향으로 바람을 받았다. 보호하라. 지키라. 날아라.
기연은 관제에 다시 통신을 보냈다. “이건 누가 공격하는 건가요?”
관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혹은 대답했지만 잡음에 묻혔다. 대신, 다른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인간의 언어와 닮았지만, 전혀 다른 리듬. 소리라기보다 빛이 말하는 느낌. 작지만 분명하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파형들이 돔의 표면을 디딤돌처럼 밟으며 지나갔다. 누구도 본 적 없는 문장들. 그러나 그 문장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경고. 제지. 정지.
동식은 어설프게 웃었다. “누가 우리 돔을 요정처럼 두드려. 우린 지금 춤출 때가 아닌데.”
“춤을 추지 않으면 떨릴 거야.” 기연이 답하며, 마지막 그룹을 흡음실로 밀어 넣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긴장이 있으나, 그는 손이 떨리지 않도록 마음의 템포를 낮추었다. 오랜 시간 반복해온 수많은 긴급상황 훈련이 몸에 새겨진 덕분이었다.
돔 밖에서는 이제 형태를 가진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들은 작고 날렵했다. 인간이 만든 어떤 장치와도 같아 보였고, 동시에 전혀 달랐다. 표면은 유기체처럼 반쯤 투명했고, 내부에는 빛의 회로가 살아있는 혈관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바람이 남지 않았다. 대신, 아주 옅은 음향의 꼬리표가 길게 끌렸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갈대가 서로를 스치며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형,” 동식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저건… 새로운 친구들인 것 같아. 나쁜 마음으로 온 것 같지는 않아. 그런데 방법이 대단히 날카롭네.”
“모든 날카로움은 누군가의 두려움에서 나온다.” 기연은 어느 때처럼 사색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사색을 허락하지 않았다. 돔의 관절 하나가 복부에서 딱 끊어지는 느낌으로 주저앉았다. 공간이 순간적으로 휘청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먼지, 먼지, 먼지.
동식이 뛰어왔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스쳐 보고, 더 말하지 않았다. 서로의 손바닥이 스치는 감촉만으로 충분했다. 갈메의 선체가 도킹 포트에 닿아 있었다. 낡은 선체는 거의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여기저기 수선의 흔적을 자랑했지만, 엔진은 새카맣게 반짝였다. 그 엔진에는 동식의 하루하루가 들어 있었다. 목표를 향한 총알이 아니라, 누군가를 품어 옮기는 호흡처럼 느린,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는 힘.
“모두 탑승!” 동식이 손바닥을 쳤다. “비상 탑승! 어린이 먼저!”
그들은 사람들을 갈메로 밀어 넣었다. 울고 있는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소년을 먼저 올리고, 어딘가 발목을 다친 청년을 부축하고, 산소통을 양팔로 끌어안고 서 있는 노인의 등 뒤를 두드렸다. 기연은 마지막으로 선체 외부를 쓸어보듯 시선을 주며, 누수 지점이 없는지, 충격으로 프레임에 걸린 스트레스가 어디에 집중되었는지 계산했다. 마음속에서, 공학 도면이 한 장씩 넘겨졌다.
갈메의 내부는 충격과 무게로 가벼운 울음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고, 벨트의 버클이 달그락 튕겼다. 동식은 조종석에 앉아, 손을 핸들에 가만히 얹었다. 그는 원하는 방향으로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는 대신, 방향이 그의 손목을 통해 몸 전체로 흘러들게 하려 했다. 기계가 사람을 기억하도록.
“갈메, 아름다운 아가. 오늘도 날아보자.” 동식이 속삭였다. 대답 대신 엔진이 낮고 깊게 울렸다. 파워 은하수 속에서 한 줄기 별빛이 고요히 생겼다.
기연은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 뒤돌아 보았다. 모래. 부서진 돔의 가장자리. 먼지 구름 속에서, 아주 잠깐, 그를 향해 바라보는 무엇인가의 눈이 있었다. 눈이라 말해도 될까. 그것은 둥글지도 않았고, 흰자위와 동공이라는 구조도 없었다. 그러나 바라보았다. 그 눈속에는 달빛처럼 가라앉은 호수와 같은 냉정함이 있었고, 동시에, 누군가의 먼 기억이 가진 슬픔 같은 것도 있었다. 그 느낌을 따라 전율이 그의 등의 골을 타고 흘렀다.
“문 닫아!” 동식이 외쳤다. 기연은 스위치를 눌렀다. 공기가 끊기고, 금속이 서로에게 기대는 소리. 내부 압력이 안정되자, 동식은 출발을 알리는 스위치를 당겼다. 갈메는 조심스럽게 도킹 포트에서 밀려나왔다. 돔 밖의 세계가 화면에 펼쳐졌다. 잠식되는 모래, 흩어지는 파편, 그리고 낯선 비행체들의 군무.
“관제, 갈메의 꿈. 탈출 경로 Z-3 요청.”
“갈메, 관제. Z-3 경로 추천. 주의. 상부 공역에서 플라즈마 웨이크가 너울. 주의. 주의. 주의.” 다음 단어들은 잘리지 않았다. 다만 의미가 모래바람 속으로 흐려졌다. 통신이 바람에 불려 나갔다가 돌아왔다. 떠돌이 언어가 되어.
동식은 휙! 휙! 엔진의 출력을 미세하게 조절하며, 민첩하게 모래 언덕 위로 갈메를 띄웠다. 주변에서는 다른 탈출선들이 깜빡이는 등화를 켰다. 사람들의 삶이 빛으로 깜빡였다. 그 깜빡임들은 아주 가까웠고, 곧 공중에서 충돌할 듯 위험했지만, 서로를 피했다. 서로가 서로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개척민들의 눈은 늘 서로를 향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낯선 비행체들이 갈메의 진로를 막았다. 그들의 표면이 다시 한 번 말을 돌렸다. 기연은 통역 모듈을 켜고, 파형 분석기의 게인을 올렸다. 무의미한 패턴이 반복되고,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서서히 다른 무언가가 추려졌다. 알 수 없는 모서리가 부드러워졌다. 뾰족한 의미들 사이의 공백이 연결되었다.
“기연?” 동식이 물었다.
“공격 아닌 제동.” 기연이 낮게 말했다. “우리를 멈추려는 거야. 손상 최소화. 하지만 고착시키려는 의지가 강해. 이유는… 모르겠어.”
동식은 어깨를 굳혔다. “그럼 이유를 나중에 물어보고, 지금은 피해야겠지. 애들, 어른들 다 태웠으니까.” 그의 손가락이 춤추듯 움직였다. 갈메는 그 춤을 추었다. 낮은 항로, 좁은 굴을 지날 때처럼, 산호초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물고기처럼, 갈메는 바람 없는 바람을 헤치고 나아갔다. 몇 차례 낯선 빛의 그물들이 그의 옆을 스쳤다. 갈메는 그물의 틈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조종석의 패널들이 미지근한 열을 뿜었다.
그 순간, 한 대의 낯선 비행체가 갈메의 앞을 날아들었다. 그것은 이전의 것들과 달랐다. 조금 더 크고, 표면의 빛무늬가 깊었다. 외피를 따라 흐르는 패턴이 마치 한 권의 기억을 읽어내는 듯한 정밀함으로 계속 변했다. 그리고 그것은 갈메와 나란히 몇 초간 날았다. 마치 두 개의 새가 서로의 속도를 맞추듯이. 동식은 본능적으로 속도를 낮췄다. 같은 순간, 그 비행체에서 한 줄기 파동이 갈메의 선체를 스쳤다. 충격은 아니었다. 청동빛이 살짝, 아주 살짝, 금속 표면을 만지듯 흔들렸다. 그 파동이 펴지는 동안, 갈메의 내부에 있던 모든 금속 물체가 매우 미묘한, 거의 들리지 않는 종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인간의 귀가 간신히 알아챌 만큼 작고, 그러나 마음에는 깊었다. 어떤 연결. 어떤 제스처.
“듣고 있어.” 기연이 중얼거렸다. “우리도.”
동식이 옆을 훔쳐보았다. 그의 눈가에는 긴장과 호기심이 교차했다. “형, 듣는 건 좋은데, 듣다가 얻어맞으면 안 돼.”
“맞지 않도록 도울게.” 기연은 손목에 찬 인터페이스 장치를 켰다. 낯선 파동의 프랙탈 구조에, 은은한 소리의 또 다른 하모니를 얹었다. 인간의 손가락으로 만든 음악. 그의 몸에 어릴 적 들었던 바다의 소리가 떠올랐다. 부서지는 파도, 멀리서 울리는 등대의 경적, 어머니가 부르는 민요. 그는 그 모든 것들을 가능한 한 얇은 형태로 압축했다. 시간을 최소화하고, 의미를 최대로 하려는 마음으로.
그는 갈메의 외피를 통해 응답했다. 도망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는 표시였다. 낯선 비행체가 잠시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놀람과 매우 닮았다. 그리고 다음 파동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기연은 다급히 데이터를 긁어모아 화상 전송 큐를 열었다. 그 순간, 바깥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바람처럼 흘렀다. 모래폭풍이? 아니, 더 큰 것. 갈메의 외벽에 드리운 그 그림자는 마치 커다란, 아주 오래된 배의 단면이 바다를 가르는 모습처럼 느렸고, 무거웠다. 돔을 공격한 그들의 모선이었다.
“형.” 동식의 목소리. 아. 그 안에는 희미한 상처가 있었다. “우리 혼자만 살아나면 안 되잖아. 갈메만. 우리는 다 같이.”
“알아.” 기연이 숨을 삼켰다. 사람들이 뒤에서 속삭였다. 어떤 아이는 기도했고, 어떤 노인은 손을 잡았다. 아마 그들도 다 같이 같은 것을 생각했겠다. 누구도 이 자리에서 한 사람을 놓고 떠나지 않겠다고. 그 약속이 그들을 여기에 묶은 것이었다. 그 약속이 잔인할 만큼 아름다웠다.
모선이 갈메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표면에는 패턴이 아닌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 기연은 직관적으로 그 이야기가 어떤 종류의 경고와 어떤 종류의 간청을 섞은 것이라고 느꼈다. 모선은 그들을 포획하려 했다. 물리적으로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피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굴절시키려는 듯 했다. 그들은 물로 만든 장벽을 세우는 것 같았다. 소리를 물로 만든 것 같은. 동식은 한껏 갈메를 위로 끌어올렸다. 경로를 틀고, 그리고 다시 틀었다. 그의 손은 누구보다도 정확했지만, 공간 자체가 미끄러지자 손끝의 감각도 함께 미끄러졌다.
“포획 광장,” 동식이 중얼거렸다. “이걸로 우릴 수놓을 심산이군.”
“그들은 우리를 죽이지 않으려는 것 같아.” 기연. “포획이라도, 치명점은 피해.”
“그럼 우린…” 동식이 얕게 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에 섣부른 웃음이 다시 돌아왔다. 비상 상황에서 그는 종종 웃었다. 웃음은 고삐였다. “우린 설득하는 자가 되어야겠지.”
그 순간, 갈메의 엔진이 헛기침을 했다. 전자기장이 뒤틀리는 순간적인 충격. 전력 공급이 깜빡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멀리서나마 들려왔다. 동식은 본능적으로 엔진을 보호하기 위해 출력 레버를 깎았다. 안전의 문제였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엔진이 꺼지면 끝이었다.
모선에서 새로운 빛이 흘렀다. 그것은 폭력도 아니었고, 그럼에도 선택지를 좁혔다. 아마 그들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멈춰라.” “우리는 너희를 해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곳은 우리에게 소중하다.” “너희가 하는 일이 우리에게 피해를 준다.”
기연은 그 뜻을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는 것은 동의와 같지 않지만, 전쟁에서는 종종 첫째가 둘째로 이어지는 다리가 된다. 그는 동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길에 이상하게도 모든 소음이 가라앉았다. “잠깐 멈추자.”
“뭐?”
“멈추면… 우리가 원하는 걸 말할 수 있어.” 기연은 담담했다. “우리가 먼저 글을 써야 해.”
동식은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동자에서, 하늘의 선명함이 선의 굵기로 변했다. “형, 난 너를 믿어. 갈메도 너를 믿어.”
“아니. 우리는 서로를 믿어.” 기연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완벽히 평온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히 따뜻했다.
동식은 천천히 갈메를 감속했다. 관성의 고작 작은 부스러기만이 그들의 어깨를 스쳤다. 갈메가 멈추는 것과 동시에, 모선에서 새로운 광장이 펼쳐졌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구조.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길을 찾았다. 그들이 만든 물의 방 속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모든 사람,” 기연의 목소리가 내부에 울렸다. “우리는 이제 상대가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공간 안에 들어왔어. 겁내지 말자. 그리고 한 가지만 약속하자.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건지, 그걸 잊지 말자.”
뒤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우리는 농사를 짓고, 땅을 덮고, 공기를 가꾸고, 물을 모았죠.” “우리는 서로를 살렸습니다.” “우리는 죄 지으러 온 게 아니에요.” “우리는 파괴하려 온 게 아니에요.”
그 말들을 모아, 기연은 통역 모듈에 올렸다. 그리고 작은 손가락으로 옛 노래를 흘렸다. 어머니의 노래. 갈메가 바다 위로 난다. 바다는 갈메를 꼭 안는다. 우리는 그 품을 만들어 준다. 우리의 품으로.
모선은 잠시 조용했다. 그 조용함은 돌로 만든 조용함이 아니라, 귀로 만든 조용함이었다. 들으려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의지가 기연의 가슴에 작은 희망으로 점등했다. 희망은 종종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너무 쉬운 게 아닐까, 너무 어린 마음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그 부끄러움을 사랑했다.
그때, 측면에서 또 한 줄기 파동이 갈메를 빗댔다. 이번엔 이전보다 강했다. 내부의 기계들이 한꺼번에 울음을 삼키듯 움찔했다. 엔진의 주파수가 낮아졌다. 동식의 화면에 수많은 빨간 알람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항 의지는 이제 사라지지 않는 실체로 등장했다. 기연은 작은 욕설이 목구멍 근처에서 굴러나오는 것을 느꼈으나, 내뱉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빛에게 말했다. “우리 말도 들어줘.”
빛이 흔들렸다. 다시, 아주 잠시. 그러나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또 다른 비행체들이 접근했다. 그들은 덜 깔끔했다. 그들의 소리는 더 예민했고, 더 높은 톤으로 떠들어댔다. 어쩌면 모선의 명령과 달리, 그들의 젊음은 인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통제, 지도, 설득, 모든 것은 언제나 균질하지 않다. 인간에게 그렇듯, 아마 모든 지성에게 그렇다.
“나쁜 예감.” 동식이 조용히 말하고, 동시에 핸들을 틀었다. 너무 늦었다. 측면에서 파고드는 빛의 칼날 같은 파동이 갈메의 오른쪽 날개를 스쳤다. 금속이 비명을 질렀다. 외벽의 우레탄이 타듯이 녹았다. 사람들의 비명은 더 얇고 더 날카로웠다. 무엇보다, 갈메의 고동이 한 번 크게 삐끗했다. 엔진의 소리가 겨우겨우 돌아왔다.
“버텨!” 동식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목의 힘줄이 터질 듯 섰다. “안 돼. 아직 아니야.”
모선의 중심부에서, 다른 색의 빛이 번졌다. 파란빛. 그 빛은 이 모든 소동을 야단치는 어머니의 목소리 같았다. 그리고 그 파란빛이 모든 것을 잠깐 씻어내리듯 덮었을 때, 갈메를 스친 칼날 같은 파동은 멈췄다. 이어서 곧바로, 청동빛의 큰 파동이 갈메를 부드럽게 감싸올렸다. 그것은 자장과도 닮았다. 포용과도 닮았다. 강제적인 포용이었지만, 폭력은 아니었다.
동식은 숨을 헐떡였다. “형, 이건… 우릴 재우려는 거야.”
기연은 손목의 인터페이스로 또 말을 걸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조금 늦었다. 파동이 그의 팔을 지나 심장까지 흘러갔다. 그는 눈을 비몽사몽 깜빡였다. 주변의 소리가 물 아래에서 들리는 듯 진해졌다. 어머니의 노래가 더 가까워졌다. 그는 그 노래를 따라 언덕을 걸었다. 붉은 모래가 바람에 흘렀다. 그 모래 위에 작은 물이 고였다. 그 물 위로 너무 낮게 나는 갈메의 그림자.
“동식.” 기연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절반쯤 꿈으로 들어가 있었다. “기억해.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린…” 동식은 무너지는 중에도 강했다. “우린 사람이고, 우리는 사람을 지키려고 여기 있어. 우리가 먼저 사람이 되면, 다른 누구라도 우리 말을 들어줄 거야.” 그의 입술은 미간을 누르는 것처럼 굳어 있었다. “형, 갈메… 갈메의 꿈을… 잊지 마.”
갈메는 낮게 울었다. 그것은 마치 응답 같았다. 기계에도 꿈이 있다면, 그 꿈은 아마 이런 소리일 것이다. 엔진의 파형이 아름답게 흔들렸다. 부드럽고, 둥글게. 그 파형 속에, 두 형제의 하루들이, 그들의 웃음과, 그들의 지친 밤과, 그들의 박수 소리와, 그들의 침묵이 무늬처럼 박혀 있었다.
파동은 더 깊게 미끄러졌다. 사람들의 눈꺼풀이 동시에 무거워졌다. 첫 번째 몸이 의자 위에서 축 처졌다. 아이들은 꿈 속에서 놀라지 않기를. 어른들은 꿈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기를. 그 바람이 갈메의 선체를 타고 돌았다. 동식은 마지막으로 조종석의 패널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의 손바닥과 금속 사이에, 뚜렷한 온기의 오고감이 있었다. 그러고 그는 눈을 감았다.
기연은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다. 그가 봤던 그 눈이, 다시 그의 앞에 있었다. 이번엔 더 가까이. 모선의 한 부분이 투명하게 열리며, 갈메의 조종석 앞에 조용한 얼굴 같은 구조가 나타났다. 인간이 만든 어떤 이미지도 아닌,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얼굴보다 더 표정 많은 표면. 그리고 그 표면에 가늘게 떠오르는 문장이 있었다. 기연은 그것을 읽지 못했다. 그러나 느꼈다.
“살아남기 위해선 서로를 알아야 한다.”
그 문장이 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어둠이 그 문장을 고요히 덮었다. 장치의 소리가 잠들었다. 모래의 바스락거림마저 멎은 듯했다. 그러나 그 멎음은 완전한 정지가 아니라, 다음 박자를 기다리는 숨 고르기였다.
기연은 마지막 힘을 다해 속삭였다. “우리는 알아갈 거야.”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갈메의 꿈은 그렇게 포획되었다. 그러나 포획은 끝이 아니었다. 때로 포획은 시작이었다. 바다를 만들려는 자들과, 바다를 지키려는 자들 사이에 놓인 미지의 선. 그 선 위에서 우리는 걸음을 떼었다. 붉은 먼지 위로, 푸른 약속의 그림자가 아주 희미하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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