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 중...
로딩 중...

1장. 브레이크 소리, 사과의 맛
브레이크가 미끄러졌고, 내 삶의 속도가 멈췄다.
유리 조각이 슬로모션으로 흩어지는 동안, 나는 여전히 오늘 오후 3시에 들어오는 영상통화 브리핑을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대형 화장품 그룹과의 MOU를 마무리 짓는 자리. 강남에 신사옥을 짓고, 일본 지사를 재정비하고, 북미 라인의 패키징을 리브랜딩해야 했다. 메모리폼 베개 위에 머리를 대본 게 언제였더라. 달력은 촘촘히 지워졌고, 내 얼굴은 보정 없이도 반짝였지만 속은 늘 매캐했다.
쿵. 그리고 정적. 탑승자 보호장치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찢어진 숨을 멈추었다. 바람이 차갑게 귓불을 스쳤다.
누군가 창문 밖에서 조심스레 소리쳤다. "괜찮으세요?"
차는 도랑 옆 잔디밭에 엎어져 있었다. 운 좋게 큰 나무를 비껴 나간 모양이었다. 창문을 깨는 소리, 이어지는 플라스틱의 파열음. 문이 열리고, 흙 냄새가, 풀 냄새가, 아주 오래전 운동장 냄새 같은 게 한꺼번에 밀려왔다.
"움직이지 마요. 잠깐만요." 낮게 깔린 목소리. 목에 걸린 바람처럼 차분하고, 이상하게도 안정을 주는 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깨닫는다. 아직 내 몸과 대화하는 법을 잊지 않았다는 걸. 한 글자도 내 입술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눈꺼풀을 잠깐 내린다. 다시 뜨면 세상이 덜 흔들려 있기를 바라며.
그는 내 팔을 어깨에 둘렀다. 옷깃에서 흙과 비누, 약간의 톱밥 냄새가 났다. 어떤 직업일까, 무슨 손일까. 순간 점멸하는 광고판처럼 ‘이미지’가 떠오른다. 강남의 조명 아래서 나는 매일 누군가의 손을 평가했다. 미용사들의 섬세한 손, 엔지니어의 단단한 손, 협력사 사장의 부자연스럽게 부드러운 손. 그런데 이 손은… 흙속을 뒤지다 방금 나온 듯한 손, 그러나 상처는 깔끔히 마련된 손. 덜컥, 그는 나를 끌어냈다.
"여기 빗길이니까, 조심…"
나는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다. 그가 재빨리 허리에 팔을 둘러 나를 붙들었다. 뺨과 뺨이 가까워질 만큼, 호흡이 엮일 산책 거리만큼의 가까움. 내 심장 소리가 넘어졌다 일어난 것처럼 쿵 하고 두 번 쳤다.
"의식은 또렷하세요?" 그가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어지러워요."
"응급차 불렀어요. 곧 올 거예요."
그의 팔이 따뜻했다. 비현실처럼 평온한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썹이 진했고, 눈빛은 담담했다. 옅은 잇몸으로 드러나는 미소가 어수선한 현장에 이상하리만큼 어울렸다. 그는 내 얼굴을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바라봤다. 나를 알아보았을까? 나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이 동네 처음 오셨죠?"
나는 속으로 숨을 내쉬었다. "네. 갈매동은… 처음이네요."
"운이 좋으시네."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보통 이 길, 저녁이면 고라니도 지나가요. 오늘은 양이 지나갔어요."
나는 그제야 도랑 건너편에 있던 울타리를 보았다. 누군가의 집 담장 낮은 돌담 너머, 양 두 마리가 선부풀어 오른 흰 털을 달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온갖 세상의 일에 관심 있는 기자처럼 낙엽을 들고 있는 내 차량 앞 범퍼를 코끝으로 툭 건드렸고, 다른 한 마리는 입안에서 천천히 풀을 되새김질했다. 그 느릿한 턱의 움직임이, 이상하게도 내 머리에서 울리던 심장의 메트로놈을 맞추어줬다.
사이렌 소리가 작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휘청이자 그는 재빨리 버선발로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만 더… 발걸음 천천히. 그쪽 진흙은 미끄러워요."
"죄송합니다." 내 입에서 습관처럼 튀어나왔다. 무언가를 망가뜨렸을 때, 일정을 어겼을 때, 조금이라도 딜이 길어졌을 때, 나는 늘 '사과'를 했고, 또 '사과'를 보냈다. 고객에게, 투자자에게, 직원들에게. 그런데 지금의 사과는… 다르다. 내 확신과 피곤의 일부를 내려놓는 사과. 나는 내 말에 스스로 낯설어졌다.
"사과는요, 나중에." 그가 웃었다. "지금은, 그냥 숨만 잘 쉬어요. 이름이…"
그 순간 구급차가 왔다. 붉고 파란 빛이 수풀을 흔들었다. 구조요원들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니, 내 손을 붙든 그의 손이 슬쩍 물러났다. 나는 조금 아쉬웠다. 이상하네, 이런 상황에.
"기연아, 고생 많았다. 저 분은…" 중년의 구조요원이 그를 보며 말했다.
"신기연." 그는 짧게, 그러나 선명히 말하며 나를 구조요원에게 넘겼다. "버스정류장 바로 뒤에 있는 작은 클리닉으로 모시면 돼요. 여기선 그쪽이 더 빠를 거예요."
"거기 신동식 원장님 계시는 데?" 구조요원이 되물었다.
"네, 그분."
나는 실려 올라가면서,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가 내 고장 난 차량 문짝을 손으로 눌러 올리고 있었고, 어쩌다 내 백시트를 빠져나온 작은 사과 하나가 잔디 위에 구르게 했던 바람이, 그의 귓머리를 오묘하게 건드렸다. 사과는 글자 그대로 사과였다. 어제 바이어에게 받은 선물세트에서 꺼내어 서류 가방에 옮겨 놓은 그 과일. 붉고 매끈하고, 아직도 냉장이 남아 차가웠다. 구조요원이 그 사과를 줍더니 내 담요 위에 올려주었다.
"이건 들고 가세요. 피쉬슈가 올 때, 당이 최고지."
나는 사과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쓸데없이 웃음이 났다. 사과라니. 진짜, 사과.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단어 중 하나가 오늘은 과일로 내 손에 있었다. 나는 엄지를 살짝 대고, 그 매끈함을 확인했다.
클리닉의 이름은 '동식의원'이었다. 입구 옆 수족관 안에는 이름 모를 작은 거북이 한 마리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갑각에 박힌 세월은 무늬로 보였다. 위에 조그만 낚시찌 같은 장식이 떠 있었고, 거북이는 그 아래 잠깐 멈춰 섰다가, 고개를 내밀었다. "거북이"라고 붙여놓은 종이 딱지가 수조 옆에 붙어 있었다.
"거북이, 오늘도 잘 있네." 누군가의 목소리가 덤덤하게 내 귀에 들어왔다.
나는 들것에서 내려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곧장 검사가 시작되었다. 동네 의원이라 했지만, 장비는 생각보다 갖춰져 있었다. 심장 박동, 혈압, 단순한 X-ray, 의사가 턱을 살짝 들어보라며 던지는 손짓. 신동식,라는 명찰. 환갑 즈음의 단단한 손. 그 손은 의사들의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손이었다.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아요. 대뇌진탕 의심, 휴식 필요." 신동식 원장이 내 진찰표에 몇 자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 "머리에 혹 생겼고, 몸살처럼 근육이 굳었어요. 하루 이틀은 누워 계셔야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야 하나요?" 나는 묻고,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일정을…"
손목의 스마트워치가 까딱이며 진동했지만, 내 손은 그 진동에 응하지 않았다. 퍽, 한숨이 작게 명치에서 올라와 맴돌았다.
"다행히 갈매동은 조용합니다." 의사가 웃었다. "전기장판 깔고 누워 있으면, 불면증이 도망갈 정도로."
나는 의무실 침대에 누웠다. 간호사가 내 곁에 사과를 놓아주었다. "당 떨어지셨을 테니, 이거라도."
"이 사과…"
"요즘 동네 농산물 마켓에서 파는 거예요. 달죠. 그리고, 깊은 사과." 간호사가 웃으며 말하고 나갔다. 농담인지, 어떤 비유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의 여운을 혀끝으로 굴리며 사과 하나를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 육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혀에 먼저 닿는 것은 단맛이 아니라, 산뜻한 소리였다. 피트니스 트레이너가 권장한 당 섭취량과 아침 식단, 영양사와의 주간 통화, 갑자기 조금 민망해졌다. 오늘은 모든 계획의 힘줄이 끊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입을 더.
문이 열리고, 그 남자가 들어왔다. 신기연. 이번에는 모자도 없고, 셔츠 소매를 적당히 둘둘 말아 올린 채였다. 손에는 네모난 흰 상자를 들고 있었다. "떡이에요. 동네 떡집에서 간단히 사 왔어요."
"환자분 보호자세요?" 간호사가 툭 던지 듯 물었고, 그가 어설프게 고개를 저었다.
"아, 그냥 목격자. 아니, 아니지. 그냥… 지역 주민입니다."
"그럼 밖에 앉아 계세요." 간호사는 조금 웃으며 나갔다.
"저 사람은 늘 저러네." 그의 중얼거림은 거의 숨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상자를 옆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네. 덕분에." 나는 사과를 들어 보였다. "사과도 있고."
그가 입 꼬리를 올렸다. "사과가 먼저 들어갔네요. 그러면 이제 사과는 나중에."
"오늘 두 번째로, 그 말을 듣네요."
그는 벽에 기댄 채, 두 손으로 서서히 셔츠 소매를 내렸다. 나는 내 몸이 이곳에 붙어 있는 동안도 내 머리는 여전히 '거래', '캘린더', '전략' 같은 단어로 번쩍거리는 걸 느꼈다. 그런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그 단어들을 밀어내는 내 자신을 보았다. 입을 열었다.
"저… 어디서 일하세요?"
"몇 군데요. 하수관 보수도 하고, 공방도 하고, 동네 현수막도 달고… 이런저런 잡일을 하죠. 잠깐씩." 그는 간단히 답했다. "여기는 작은 동네니까요."
"그래서 손에서… 톱밥 냄새가." 나는 무심코 말했다가, 놀랐다. 내가 이렇게 남의 손 냄새를 말하는 사람이었나?
그는 웃었다. "맞아요. 수초 작업도 해요. 거기 거북이, 알죠? 동네 아이들이 '거북이'라고 붙여줬어요. 지켜봐주는거죠. 가끔 수돗물 바꿔주고, 이끼도 긁고."
나는 수족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북이는 작은 발로 수면을 툭툭 차고 있었고, 발끝에서 생긴 동그란 물결이 천천히 퍼져나갔다. 그 퍼짐을 가만히 보며, 나는 생각했다. 신기연이라는 사람이 거북이를 씻겨준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사려깊게 느껴졌다.
"저는…"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문적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말들이 목구멍에 걸렸다. 한 번 더 사과를 씹는다. "저는 이지유입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유 씨. 저는 아까 들었죠. 신기연."
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신기연. 소리로 들으면 '신기한 연' 같았다. 어떤 사람과 연결되어도 늘 신기하고 새로워야 한다는 압박을 받던 나와 잘 어울리는 은유 같았다.
"전화는…"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락할 사람 있어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 질문이 왜 이토록 무거운지. 연락할 사람은 많았다. 비서, 부대표, 법무팀장, 광고대행사 대표, 국회의원의 비서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연락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할 수 있을까. "차가 고장 나서요. 오늘은… 조금, 쉬었다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더 묻지 않았다. 무심함과 친절함의 좋은 사이를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이 동네의 속도에 맞춰 살아온 사람의 눈빛.
그날 오후, 나는 갈매동의 공기 속에서 조금 스며들었다. 클리닉의 뒷문을 통해 작은 마당으로 나갔다. 오랜 육식 집에서 익숙하던 기름 냄새는 없었다. 대신 습기와 흙, 그리고 누군가의 빨래에서 말라가는 비누 냄새. 아이들이 코끼리 슬라이드 위에서 웃고 있었다. 달리기하는 아이들을 따라, 하얀 양 한 마리가 울타리 안에서 뛸 듯 말 듯 고개를 내밀었다. 다른 한 마리는 여전히 되새김질.
"우리 동네 양, 귀엽죠?" 어느새 곁에 와 있던 여자가 말을 건넸다. 쇼핑백을 든, 아마도 동네 카페 사장 같은 옷차림. "저기 공원 옆 도시농장에 살아요. 우리 이름도 있어요. 여긴 '미도', 저기는 '찬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팬미팅처럼 아이들이 양의 울음소리를 따라하며 깔깔댔다. 한 아이가 내 팔을 잡아당겨 손바닥에 작은 얇은 금박 스티커를 붙였다. 하트 모양.
"이쁘다."
"이쁘네." 그 말이 내 입에서 저도 모르게 나왔다.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이쁘다'가 늘 누군가의 피부에, 결과물에, 완성도에 향하던 것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하트 하나였다. 아주 얇고 반짝이는.
"저거 붙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소원. 무엇이었지. 언제부터인지, 소원이라는 단어는 목표와 키 성과 지표 사이에 낀 어린 사촌 같다. 귀엽지만 불편하고, 생채기 나지만 지나치기 쉬운 존재. 나는 조심스럽게 하트 위에 손가락을 젖혀 보았다.
"지유 씨." 뒤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신기연이었다. 그의 뒤에는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운동화 끈을 허리춤에 한 번 더 감아 묶은 것 같은 단정함. 공무원 같기도, 도시 계획과 인턴 같기도. 그는 수줍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지훈입니다. 갈매동 주민센터에서 일해요. 아까 사고 소식 듣고, 주민 안전 쪽 담당이라 잠깐 왔어요. 불편한 건 없는지 확인하려고요."
그에게서 행정적인 냄새가 났다. 규정, 안전 관리, 상호 협력 같은 단어가 잘 맞는 사람. 나는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잘 도움 받고 있어요."
"다행입니다." 김지훈은 수첩을 꺼내 몇 가지 체크를 했다. "차량 처리 관련해서는, 우리가 견인 도와드릴게요. 운전자는 괜찮으신지 확인했고요. 혹시 거주하시는 곳 연락처나… 아주 잠깐 머무를 곳이 필요하시면, 우리 동네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가—"
"제 집 비었어요." 신기연의 말이 김지훈의 말에 살짝 끼어들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윗층 방 하나. 어머니가 쓰시던 방인데, 지금은 비어요. 오늘만요. 움직이기 힘드시잖아요."
나는 입술을 조금 벌리고 그를 바라봤다. 자신이 무엇을 제안했는지를 방금 알게 된 사람의 조금 당황한 눈빛. 그 어색함마저도 진심 같았다.
"그게… 괜찮을까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죠." 김지훈이 나를 대신해 답했다. "갈매동은 늘 그런 곳이니까요. 서로 좀 엉키고, 서로 좀 기대고요."
나는 몰랐다. 도시의 다른 쪽, 높은 빌딩들이 유리창을 닦으며 서로의 빛을 반사하는 곳에선 그런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탁은 늘 거래였고, 호의에는 늘 비용이 붙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 습관을 잠깐 내려놓고 싶었다.
"그럼… 신세를 질게요."
그날 저녁, 갈매천을 따라 걷는 길 위로 노을이 비슷한 색으로 길게 늘어졌다. 갓 빨아 넌 티셔츠에서 비누 냄새가 나고, 빵집 문앞에서는 누룽지와 버터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향이 올라왔다. 신기연의 집은 마을 버스 정류장 뒤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2층 집이었다. 오래된 갈색 벽돌 사이에 덩굴장이 올라탔고, 문패는 손으로 써서 붙인 듯 했다. '신家.' 단순해서 더 진짜 같았다.
"여깁니다."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신발 선반 위에는 오래된 운동화와 레인부츠, 그리고 작은 빈 유리병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사이에 설탕처럼 깨끗한 조약돌 하나. 그는 올라가기 전에 어색하게 물었다. "혹시… 신발 사이즈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냥 양말 신을게요. 괜찮아요."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내 허리에서 아직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방이라는 곳은 작은 창문이 있고, 베이지색 커튼이 걸린 방이었다. 커튼 아래로 노을이 침대 모서리에 길게 흐르고 있었다. 내 눈썹의 힘이 살짝 풀리는 걸 느끼면서, 나는 침대에 조심히 앉았다.
"물은 거실에 있어요. 냉장고는 자유롭게. 저녁은…" 그는말 끝을 흘렸다. "라면 괜찮으세요? 아니면 동네 김밥."
"라면… 좋죠." 나는 뜻밖의 대답에 스스로 놀랐다. 라면은 내 식단 계획에서 늘 금지된 항목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사과도 먹었고, 내 마음은 어디로든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매운 거, 안 매운 거?"
"중간으로요."
그는 웃었다. "기준이 있는 사람 같아요."
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시작되었고, 나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장롱 위에는 오래된 양은 주전자와, 누군가의 사진이 두 개. 한 사진 속 여자 사람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었다. 검은 비단에 파란무늬가 들어간 옷. 담담하게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 사람은 신기연과 닮았다. 아마 어머니겠지. 나는 조금 숙연해졌다.
창문을 열자 갈매천에서 올라온 찬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개울 소리, 누군가가 휘파람으로 부는 노래, 아이들이 부르는 아니면, 양의 '매애' 소리. 그 소리들은 장식이 아니라 배경이었다. 나는 그 배경에 나를 놓아보았다. 그동안 나는 내 배경을 내 얼굴로 덮어버렸던 사람이다. 여기에선, 반대로 배경이 나를 감싸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으며 중얼거렸다. "여기…"
"우리 동네, 마음에 들어요?" 문틀에 기댄 신기연이 물었다. 라면의 김이 그의 뒤에서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고, 그 향이 방 안으로 공처럼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해서 좋아요. 그리고… 변할 것 같아요."
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였다. "변할 것 같아요?"
"네." 나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길이 있고, 사람들 발걸음 소리가 여유롭고. 이런 곳은, 제대로 손대면 빛나거든요. 그 빛이 지나치게 잡음을 끌어다 주는 게 아니라, 제 속도를 갖춰주는 빛." 나는 말을 멈췄다. 내가 스스로 놀랐다. 꼭 회의실에서 프레젠테이션 하듯이 말하고 있다. "이런 표현 좀…"
그가 웃었다. "괜찮아요. 그럼 지유 씨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는 거네요."
"사람?" 나는 되물었다.
"여긴, 사람이 먼저예요. 건물은 그 다음. 그래야 오래 가요. 우린 다 알아요. 누가 여기에 오래 머물지, 누가 바람처럼 지나갈지."
나는 그의 말에 젖혀졌다가, 갑자기 내 어깨의 긴장이 풀렸다. 오래 머물지. 바람처럼 지나갈지. 나는 늘 바람이었다. 행사장을 지나고, 계약서에 사인하고, 오픈런 매장의 리본을 끊고, 다음 날 다른 도시로 떠났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향기가 남지만, 사람은 남지 않았다. 그게 전부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 집의 매트리스의 탄성을 느끼고 있다. 선택지가 늘 눈앞에 흐릿하게 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흐릿함 속에서 하나를 잡는다.
"좀… 머무를게요."
그는 당황한 듯 내 얼굴을 봤다. "네?"
"머무를게요. 오늘 말고, 조금 더." 나는 내 목소리를 믿어보기로 했다. "여기서, 지내고 싶어요. 몇 주, 아니면 그 이상. 괜찮나요?"
그의 눈빛을 보는 것이 이상하게 떨렸다. 그는 손에 든 젓가락을 고쳐 쥐었다. "그건… 집주인이 결정할 일이 아닌가요?"
"집주인." 나는 웃었다. "그럼 집주인, 허락해요?"
그는 한숨과 함께 웃음을 내뱉었다. "지유 씨."
"네?"
"웃을 때도… 일할 때처럼 웃네요. 요구사항 몇 가지 들이밀 것처럼."
나는 두 손을 모았다. "요구사항 두 가지. 방 안에 거울은 작은 걸로. 그리고…" 잠든 침대 위에서 그가 가지고 있을 가족의 기억을 헤아렸다. "방 안 사진은 그대로 두고 싶어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같은 생각."
우리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라면을 먹었다.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 김이 빠져 나가는 소리, 누군가 물을 틀어 씻는 소리. 내 입 안에 들어온 매운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모든 걱정과 함께 내려갔다. 나는 웃음을 참다가 결국 터뜨렸다. "나, 라면… 진짜 오래간만이에요."
"맛있죠?" 그는 자신의 그릇을 내밀며 계란 반쪽을 덜어줬다. "반반."
"반반." 나는 계란을 받아들였다. 누군가와 반씩 나눈다는 건, 마지막으로 언제였을까. 내겐 언제나 '전부' 아니면 '무'였다. 이런 '반'이 주는 안도감이 이렇게 큰지 몰랐다.
"지유 씨."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진지하게 말했다. "갈매동은 유명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네?"
"그러니까… 누군가가 유명하든, 아니든. 우리한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해요. 어디 가서 어떤 자리였든, 여기서는… 그냥 이름만 있으면 돼요."
그의 말은 톱밥 냄새만큼 따뜻했고, 수돗물만큼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곳에서… 그냥 지유로 있을게요."
"좋아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여기서 지유 씨에게 친절할게요. 그런데, 지유 씨도… 이 동네에 친절해 주세요. 우리가 가진 속도, 습관, 규칙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지유 씨의 빛으로 우리를 더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말을 최대한 섬세하게 접었다. 마음의 가장 안쪽 서랍에 넣을 수 있도록. "그게 제가 잘하는 거예요."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도시에서 늘 들리던 차 소리 대신, 나는 거북이가 수면을 툭툭 차는 소리를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고개를 빼고, 숨을 길게 내뱉는 거북이. 느린 호흡. 그 호흡이 내 가슴에 맞춰졌다. 그리고 양 두 마리가 울타리 너머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꿈을 꾸었다. 한 마리는 여전히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내 계단 아래를 올려다보며 '매애'를 하고 있었다.
새벽에 잠깐 눈을 떴다. 머리맡에 두었던 사과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그것을 들고, 창문을 열었다. 차갑고 깨끗한 공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 달콤함이 아직도 나를 괴롭히던 일감의 잔향을 묻히도록, 다시 한입. 나는 사과씨 세 개를 손바닥에 받았다. 아직 촉촉한 씨앗들. 나는 장롱 위 아닐, 베란다에 놓아 두었던 작은 흙 화분을 찾았다. 누군가의 페퍼민트가 자라다 말아 멈춘 듯한 흙. 그 안에 사과씨를 세 개, 톡, 떨어뜨리고 모래를 조금 덮었다.
"자라라." 나는 속삭였다. "여기서."
다음 날, 갈매동은 여전히 갈매동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김지훈이 노란 리플렛을 들고 계단 아래 서 있었다. "어제 밤에 연락 못 드렸는데, 어제 사고 관련 서류 좀…"
그 뒤에 신기연이 나타났다. 그의 손엔 뒤늦게 가져온 듯한 작은 납작한 빵과 우유 두 병이 들려 있었다. "아침은… 기본으로 먹어야죠."
나는 웃었다. 어색하지 않게. 누군가에게,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를 소개하는 웃음이었다. "고마워요."
김지훈은 리플렛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도시농장 안내도, 마을축제 일정, 쓰레기 분리 안내, 그리고… 주민회 연락처. 저기 회장님은 신동식 원장님."
"원장님이 회장님?" 나는 웃었다.
"네. 뭐, 그렇게 됐죠." 김지훈도 웃었다. "그리고, 이건…" 그는 작은 봉투를 꺼냈다. "동네 할인 쿠폰. 카페, 빵집, 미용실."
미용실이라는 단어에 내가 잠깐 멈추는 걸 그들은 느꼈으려나. 이곳 미용실들의 손. 그 손으로 나는 나의 기술과 이 동네의 취향을 연결할 수 있을까. 내가 본능적으로 머릿속에서 계산을 한다는 것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계산엔 다른 요소가 있었다. '시간'이라는, 아주 느린 계수.
"지유 씨?" 신기연이 내 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커피는 설탕 넣으세요? 아니면, 사과."
"사과 커피?"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 요즘 그런 메뉴도 생겼더라고요. 어제부터 사과라는 단어가 자꾸 나오니까, 괜히."
"오늘은… 설탕 조금만." 나는 말했다. "그리고 사과는, 오후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북이 물도 갈고 올게요. 같이 갈래요?"
"거북이?" 나는 물었다.
"동식의원에요. 오늘 물 갈아줘야 할 때거든요. 느릿하고, 큰일 없이, 조용히 하는 일. 그런 일은 늘 사람을 편안하게 해요."
나는 신발을 들고 내려왔다. 어쩌면 이 동네는, 나의 새로운 작업실이 될지도 몰랐다. 여기에 나는 속도와 소리, 향과 빛을 깔끔하게 묶으며, 이 낯선 도시를 '최고의 부촌'으로 키워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는 돈이 아니라, 사람일지도 모른다. 얼굴이 아니라, 마음일지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누군가는, 하수관을 고치고, 거북이 물을 갈고, 낡은 집의 문틀을 매만지는 사람. 나를 아무도 몰라주는 곳에서, 내 이름 세 글자만으로 날 불러주는 사람.
갈매천 위로 아침 햇살이 점점이 부서지고 있었다. 거북이는 오늘도 수면을 툭툭 찼다. 양 두 마리는 울타리 너머에서 주말의 축제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잔디를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김지훈은 하루의 체크리스트를 펼치고 손가락으로 조목조목 짚었다. 신동식은 의원의 문을 열며, "어제는 고생 많았지."라고 내게 축약된 안부를 건넸다.
나는 차가운 물을 두 손으로 받쳐 마셨다. 깨끗하고, 조금 달았다. 그리고 내 안에서 작은 사과씨가, 아주 작은 떨림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어느 방향으로 자랄지 모르는, 그러나 분명히 자라려는 의지의 떨림.
"신기연."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돌아다보며 물었다. "네?"
"오늘 오후… 시간 있어요?"
그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조금. 왜요?"
"동네를 좀 보여줘요. 내가모르는 것들, 많이."
그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그런 건 내가 좀 잘하죠. 그리고, 내가 모르는 것도 지유 씨가 보여줘요."
우리는 그렇게 약속을 만들었다. 느릿하지만 단단한, 아주 큰 도시의 속도와 아무 상관 없는 약속. 나는 내 이름 옆에 적힌 '대표'라는 두 글자를 접어 가방 깊숙한 곳에 넣었다. 아직 버린 건 아니다. 그건 언젠가 다시 펼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접어둔다. 대신 사과씨가 들어있는 작은 화분을 내 손바닥에 얹으며, 내 안에 심어진 무언가를 돌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씨가 틔울 이야기에, 이미 작게 빛나는 사랑의 싹이 있는 것을, 나는 아마도 짐작하고 있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
다음 에피소드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