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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마음드리의 문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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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여름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차가운 빗방울이 회색빛 도시를 두드렸다. 도로 위에 쏟아진 작은 물방울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 도시의 소음은 한 겹 낮아졌지만, 마음 깊은 어둠은 점점 짙어졌다.
김은아는 창가에 서서 사무실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드리라는 이름이 크게 적힌 간판 아래로, 빗물이 줄지어 흐르고 있었다. 마음드리—마음의 드리우는 손길,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들이 모인 곳.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할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곳. 그곳의 대표가 바로 김은아였다.
은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익숙한 이름, ‘상희’였다. 은아는 잠시 망설였다가 전화를 받았다.
“네, 상희 씨?”
“대표님… 혹시 오늘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상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떨리는 숨소리가 전해졌다.
“지금 당장 와도 괜찮아요. 혹시 사무실 앞이에요?”
“네… 근처에요.”
“올라오세요. 따뜻한 차 준비해 놓을게요.”
통화를 마치고 은아는 사무실 안을 정돈했다. 작은 테이블 위에 국화차를 올려두고, 간접등을 켰다. 마음드리 사무실은 언제나 은은한 조명과 포근한 소파, 그리고 벽면 가득한 초록 식물들로 가득했다. 은아는 환자를 위한 공간이지만, 그 자신에게도 이곳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문 너머로 상희의 흐릿한 그림자가 비쳤다.
은아는 문을 열었다. 상희가 우산을 접으며 고개를 들었다. 젖은 머리칼, 창백한 얼굴. 평소의 상희와는 전혀 달랐다.
“어서 와요, 상희 씨. 감기 들겠어요.”
상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아는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 앉아요. 국화차에 꿀 넣었어요. 오늘은 특별히 달콤하게.”
상희가 소파에 앉자마자, 은아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에 컵을 쥐어주었다. 상희의 손이 약간 떨렸다.
은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오늘은 목소리가 많이 힘들어 보여요.”
상희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국화차 향기가 사무실 안을 감쌌다. 빗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오늘… 그 사람을 길에서 마주쳤어요.”
은아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상희가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은아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 상희의 악몽이자, 상희의 공황장애를 시작하게 만든 인물.
“마주쳤을 때,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숨도 제대로 못 쉬겠고…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어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손발이 다 저려왔어요. 그 사람이 웃고 있었어요.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상희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은아는 상희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괜찮아요. 상희 씨, 여기서는 숨 쉬어도 돼요. 괜찮아요.”
상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은아의 손길이 작은 위로가 되어, 상희의 어깨가 조금씩 풀렸다.
“지금도… 가슴이 답답해요. 또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요.”
“상희 씨, 우리 지난번에 배웠던 호흡 기억나요? 같이 해볼까요?”
상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아는 조용히, 천천히, 상희와 함께 호흡을 맞췄다.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고. 한 번, 두 번, 세 번. 빗소리와 함께, 상희의 호흡도 조금씩 안정되어갔다.
“잘하고 있어요, 상희 씨. 아주 잘하고 있어요.”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국화차가 식어가고, 빗줄기가 조금 약해졌다.
“대표님, 나… 정말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상희의 목소리는 아직 불안했지만, 한 줄기 희망이 묻어났다.
은아는 미소 지었다.
“상희 씨, 저는 상희 씨가 괜찮아질 거라는 걸 믿어요.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걸을 거예요. 절대 혼자가 아니에요.”
상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은아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작고 단단한 믿음이 두 사람 사이에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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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은아는 사무실에 홀로 남아 서류를 정리했다. 마음드리에는 많은 사연들이 쌓인다. 누구는 남편의 폭력에서, 누구는 연인의 배신에서, 누구는 가족의 무관심에서, 모두가 각자의 고통을 안고 이곳을 찾아온다.
은아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빗방울이 여전히 사무실 창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이번에는 ‘동식’이라는 이름이 떴다.
“여보세요, 동식 씨?”
“은아 대표님… 죄송한데,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동식의 목소리에는 늘 가라앉은 슬픔이 묻어 있다. 그는 세상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상처를 받아,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된 사람. 은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집에서 나올 수가 없었어요. 밖에 사람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안 쉬어져서….”
은아는 잠시 침묵했다. 동식은 늘 용감하게 버티다가, 한순간 무너진다. 그럴 때마다 은아는 그를 다독여왔다.
“천천히, 내가 지금 옆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 지난번에 했던 작은 연습 기억나요? 그때처럼, 천천히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세어볼까요?”
전화기 너머로 동식의 숨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하나, 둘, 셋….”
“잘하고 있어요. 동식 씨, 혼자가 아니에요. 언제든 전화해도 괜찮아요.”
동식은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은아는 전화를 끊고, 탁자 위의 마음드리 상담일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하루하루, 자신과 싸우는 이들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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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았다. 은아는 평소처럼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커피를 내리고,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들였다. 그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마음드리입니다. 김은아 대표입니다.”
“저… 혹시, 오늘 상담 예약 가능한가요?”
여자 목소리였다. 떨리는 목소리, 어딘지 다급했다.
“네, 오늘 오후 가능해요. 이름과 간단한 사연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세라라고 해요. 저… 데이트 폭력 때문에… 밖에 나가기 힘들어서….”
은아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세라 씨, 오늘 오시면 저희가 최대한 편하게 도와드릴게요. 오시기 힘드시면 온라인 상담도 가능합니다.”
“아뇨, 직접… 가보고 싶어요. 용기가 필요해서요. 오늘 오후에 갈게요.”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전화를 끊고, 은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또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이곳을 찾아온다. 그 용기를 외면하지 않기 위해, 은아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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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자, 마음드리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키가 작은 젊은 여성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들어왔다. 세라였다. 은아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세라 씨, 오셨군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세라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밖에 나오는데… 너무 무서웠어요.”
“잘 오셨어요. 이곳은 세라 씨를 위해 준비된 공간이에요. 천천히, 아무 말 안 해도 괜찮아요. 여유 있게, 편하게 있어도 돼요.”
세라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은아는 조용히 기다렸다.
“저… 연애할 때, 그 사람이 손찌검을 했어요. 처음엔 미안하다고 했는데, 점점 자주…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헤어지자고 하니까 더 심하게….”
세라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다. 은아는 조용히 손수건을 건넸다.
“세라 씨, 여기서는 울어도 괜찮아요.”
세라는 흐느꼈다. 은아는 옆에 앉아, 조용히 등을 감쌌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건가 싶었어요. 내가 더 잘했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세라 씨, 그건 세라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누구도 폭력을 받아도 되는 이유는 없어요. 세라 씨는 이미 충분히 용감했어요. 오늘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거예요.”
은아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단호했다. 세라는 그제야, 조금 숨을 골랐다.
“혹시, 세라 씨도 숨이 막히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그런 증상이 있었나요?”
“네… 버스 타는 것도 무섭고, 사람 많은 곳도 무서워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라 씨, 그건 공황장애라는 이름이 있어요. 몸이 위험하다고 느끼면, 마음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보내는 신호예요. 세라 씨가 약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세라 씨가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는 뜻이기도 해요.”
세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저와 함께 작은 연습부터 해볼 거예요. 숨 쉬기, 자기 위로하기, 그리고 조금씩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연습까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세라는 은아를 바라보았다. 작은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스쳤다.
“정말…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은아는 미소 지었다.
“네, 세라 씨. 저와 함께라면, 반드시 괜찮아질 거예요.”
세라는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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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졌다. 마음드리의 창문에 노을이 비쳤다. 은아는 사무실에 홀로 남았다. 상희, 동식, 그리고 세라. 그들의 이야기가 사무실 안에 남아 있었다.
은아는 다이어리에 오늘의 기록을 남겼다.
- 상희: 오늘도 용기를 냈다. 과거를 마주했지만, 다시 숨 쉴 수 있었다. - 동식: 전화로 호흡 연습 성공. 다시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 세라: 처음 방문. 눈물 속에서 다시 살아갈 용기를 발견했다.
은아는 다이어리를 덮고, 창밖을 바라봤다. 빗방울이 멈췄다. 도시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마음드리의 작은 등불은 여전히 밝혀져 있었다.
은아는 자신에게 다짐했다.
‘내일도, 또 다른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이곳을 찾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함께 걸어갈 것이다.’
마음드리의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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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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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앞으로 상희, 동식, 세라가 각자의 공황장애와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서로에게 용기가 되고,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그려나갈 예정입니다. 김은아 대표와 마음드리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공간이자, 새로운 희망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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