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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달 없는 밤, 붉은 족보
내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결심한 날은, 그 사람의 사진조차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이었다. 아니, 사진은커녕 초상조차 남지 않았다. 족보의 먹선만이 살아 있고, 이름 셋과 자(字), 본관, 출생과 사망의 연도 위에 얇은 먼지처럼 아득한 세월이 내려앉아 있었다. 내 손끝이 닿자 그 먹선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붓끝이 스친 듯한 그 질감이, 현실이 아니라고 다독이는 정교한 꿈 같기도 하고, 아주 오래전 나를 부르는 낯선 손짓 같기도 해서,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이현우, 자(字) 자운. 본관 전주. 1593년생, 1643년사.”
할머니의 유언장을 정말로 믿은 것은 그 이름을 처음 읽었을 때였다. 첫딸은 물을 조심하라. 스물아홉을 넘기지 못한다. 우리 집안 여자들은 늘 물에 닿아 죽는다. 믿지 못하겠으면 조선 선조 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를 보아라. 첫딸들 이름 옆에 작은 붉은 점이 있단다. 붓끝으로 찍은 피와 같은.
나는 그 점들을 세다가 낮과 밤을 잊었다. 작은 점들이 빨갛게 타오르는 별처럼 뭉쳐 밤하늘을 이뤘다. 나도 그 별무리 속에서 서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는 엄마 제삿날이었고, 안방에 놓인 제기 옆에서만큼은 끝없이 소설 같은 유언장도, 알 수 없는 저주도 잊으려 했지만, 음식 그릇에 비친 내 얼굴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점점 엄마를 닮아 있었다. 물에 젖은 머리칼, 되묻는 눈, 마른 웃음.
문득 팔목에서 차고 있던 노리개를 매만졌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주고 간, 비늘이 매끄러운 박쥐 모양의 노리개였다. 박쥐는 복(福)을 부른다며, 손때가 묻은 끈을 내 손등이었다. 복. 그 말이 참 오래된 피처럼 달았다.
휴대전화가 떨렸다. 우리의 단톡방.
“없습니다 수 있냐 ㅋㅋ”
누군가가 반쯤 졸린 손가락으로 칠 수 있는 말투였다. 초등학교부터 알고 지낸 애들, 그 중에도 다온이와 지연이. 조문 다녀가던 날 밤, 그 애들이 내 앞에 놓고 갔던 커피가 식어가는 동안 우리는 스무 살이 지났음을, 서른이 코앞이라는 걸, 그럼에도 여전히 술자리에서 쪼개듯 웃을 수 있다는 걸 말없이 확인했다. 또르르 굴러온 메시지가 몇 개 더 떴다.
“자기는 친구랑 뽀뽀 못한다고함 보자 ㅋㅋ” “야 근데 하연 오늘 얘기하려던 거 뭐였음” “저는 진심 얘기할 때 그때 뭐라고 말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너무 긴장해서 뭐라고 말했었는지 준비한 말은 제대로 했는지 반응은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랫동안 고민하고 말한건데 걔들은”
갑자기 가슴이 꽉 막혔다. 그 문장들은 단톡방이라기보다는 내 머릿속 소용돌이 같았다. 나는 진심을 말하려 할 때마다 혀끝이 굳었다. 엄마에게도, 좋아했던 사람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나는 스물아홉 전에 죽을지도 몰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건, ‘나 정말 너 좋아해’보다도 더 어려운 고백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손끝에서는 남의 생사를 뒤집을 결심이 끓고 있었다.
도서관의 어둠은 비밀을 좋아했다. 오전부터 비가 내렸고, 창문은 검은 편지지처럼 무겁고 매끈해져 있었다. “잠시 자리 비움”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내놓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귀퉁이에 조그맣게 “이하연, 족보 열람 중입니다”라고 적었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지만, 종종 의미 없는 행동이 사람을 붙잡아주기도 한다. 숨은 깊고 작아졌다. 손등 위의 핏줄이 푸르게 솟구치고 있었다.
이름 옆 붉은 점은, 내 게슴츠레한 눈을 깨우는 등불 같았다.
이현우. 할머니가 언젠가 흘리듯 이야기했을 때, 그 이름 곁에는 ‘자운’이라는 자가 붙었다. 자운. 구름 아래의 아이. 내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옛 소씨의 시에서 본 듯한 자였다. 진부하고도 낯선, 그래서 더 살갗을 긁는.
족보는 늘 말이 없다. 대신 손이 있다. 몇백 년 전 누군가의 손, 강물이 쓸고 간 돌처럼 무뎌지기 전의 손, 나무판 위에 먹을 올려 바람 같은 것을 그려보던 손. 그 손끝이 지금 내 손 끝과 맞닿았다. 나는 노리개를 꼭 쥐고 작은 칠성판처럼 배치된 붉은 점들을 다시 읽었다.
“첫딸 비석. 물. 자운.”
그 단어가 내 입 안에서 상처처럼 피었다. 언어는 칼끝이 아니라도 상처를 내니까. 나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조용한 도서관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나 너, 죽일 거야.”
목소리는 기침처럼 가볍고, 약속처럼 무거웠다. 손끝에서 노리개의 매듭이 풀릴 듯 말 듯 흔들렸다. 박쥐의 날개를 닮은 은장식이 기웃거렸다. 나는 그 작은 은장식이 보름달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달은 물에 비치면 둘이 되고, 때로는 셋이 되기도 하니까.
밤, 내 방 창문에 빗소리가 박쥐 날개지처럼 날았다. 알람이 세 번 울렸고, 나는 이미 세 번 모두 무시했다. 네 번째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대신 문틈 아래, 누군가 밀어 넣은 편지처럼, 연무가 밀려들었다. 내가 문을 열면 다른 계절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무릎 위에서 잠들어 있던 족보를 펴고, 노리개를 거기에 올려두었다. 할머니의 유언장을 다시 읽었다.
“물이 열린 날, 문묘로 가렴. 대문 말고, 돌계단 아래 자그마한 물고기 문양을 따라 내려가면, 문이 열리리라. 노리개를 비추면 길이 보이고, 피를 바르면 길이 닫힌다.”
보통 유언장에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혼자 헛웃음을 삼켰다. 추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떨림이 손끝에서 팔꿈치로 올라왔다. 피. 나는 바늘상자에서 얇은 핀을 꺼내들었다. 햇빛 대신 형광등 아래에서 핀은 비늘처럼 반짝였다. 무언가가 나를 떠밀었고, 무언가가 나를 잡아당겼다. 혼자라는 사실이 위로였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위로였다.
핀 끝이 손가락을 찔렀을 때, 거의 아프지 않았다. 대신 왠지 익숙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내본 건 아마도 이 말 그대로 수도 없이 많았을 테니까. 노리개의 박쥐 날개 끝에 붉은 점이 맺히고, 그 점이 다시 족보의 붉은 점에 닿았다. 순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났다. 빗방울은 비둘기떼처럼 날았고, 전깃줄이 어딘가서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바닥이 기울었다. 어딘가로, 아니라면 안쪽으로.
나는 고개를 떨구고 웃었다. 사람이 현실을 떠나려 할 때, 가장 끝까지 붙잡는 건 늘 사소한 것들이다. 아끼는 컵, 스마트폰, 다 발 뒤꿈치의 각질, 친구들의 반 토막 메시지들. “자기는 친구랑 뽀뽀 못한다고함 보자 ㅋㅋ.” 끝내 그 문장이 마지막으로 떠올랐다. 황당하고, 익숙하고, 어쩐지 마음 아팠다. 그래, 나는 뽀뽀를 못했지. 아무에게도.
그리고 어둠.
—
어둠이 빛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내 경우 그것은 냄새였다. 김이 서린 나무, 갓 구운 떡의 단내, 축축한 흙과 말의 숨결, 송진과 장한 소금의 냄새. 그리고 사람. 사람의 살, 땀, 생, 생생함. 달은 없었지만 다들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보고 있었다. 낮고 넓은 처마 끝이 겁을 먹은 나뭇잎들처럼 어둠을 모으고 있었다. 내 신발은 스니커즈가 아니었다. 맨발이었다. 그제야 나는 숨을 들이켰다. 맨발로 서 있는 흙바닥이 따뜻했다.
“이봐, 너.”
낯선 말투였다. 서울 사투리도, 전라도도 아닌, 내가 국사책에서 읽은 ‘옛사람들이 했을 법한 말’. 그런데 그의 목소리 톤은 낮았고, 뚝 떨어진 발음은 지나치게 분명했다. 겁을 먹을 틈은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긴 창칼 같은 눈매의 남자가, 그야말로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갓을 쓴 그 남자의 옆얼굴은 바람을 타고 지나온 매화향 같은 것이었다. 깊고 차가운 것이 한겹, 얇고 따뜻한 것이 한겹, 서로를 잊지 못해 겹쳐진다. 얼굴선은 날렵하게 떨어졌고, 연탄불 위에 얹은 주전자처럼 묘하게 빛났다. 밤이었으나 눈빛에서 은빛 기름이 한 겹 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쉬면 향이 났다. 가죽끈에 걸린 옥장식이 살짝 흔들렸다. 사람을 찌르면 피가 날 것 같은 외모라기보다, 사람을 바라보면 말이 나오는 얼굴이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히게 잘생겼다.
그리고 그는 내 옷차림을 보았다. 내가 맨발이고, 얇은 여름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맨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머리가 허술하게 묶인 것을, 내가 어디에서 떨어진 이물질처럼 여기에 있는 것을. 그의 손끝이 재빨랐다. 자신이 걸친 도포자락을 거둬, 내 어깨에 덮어주었다. 도포는 가볍게 믿음직한 무게였다.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지만, 내 입은 한 마디도 내주지 않았다.
“여자 혼자, 이 밤중에.”
그는 달빛처럼 웃었다. 빛나지만 차가운, 그러나 차갑지만 이상하게 따뜻한.
“어디서 나왔소?”
이 질문을 누군가에게 처음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어디서 왔어요?’가 아니라, ‘어디서 나왔소?’ 나는 도포깃을 붙잡고 눈을 멀뚱 멀뚱 떴다. 대답할 수 없다. 그가 나를 미친 사람처럼 볼 것이다. 아니면 귀신처럼.
“길을 잃었어요.” 결국 그 말이 내 뱃속에서 떼굴떼굴 굴러 나왔다. “집을 찾아요.”
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기름 한 방울처럼 윤기를 띠었다. “네가 말하는 집이 어디냐에 따라, 내가 데려다 줄 수도, 못 데려다 줄 수도 있지.”
“문묘,” 나는 벌써 ‘문묘’라는 말을 혀끝에 올려놓고 있었다. “종묘요.”
그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곳에는 밤중에 드나드는 법이 없는디.”
그의 억양에는 바람에 실린 산맥의 그림자가 있었다. 나는 어깨를 조금 웅크렸다. 도포가 내 어깨를 꽉 잡아내렸다. 오랜 손길에 길든 옷가지였다. 갑자기 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조선 시대에 와서, 나는 누군가의 냄새가 이렇게까지 진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항구 같은 냄새. 닻을 올리거나 내릴 수 있는 냄새.
“길이라면, 내가 더 잘 알지.” 어느 결심인지 모르게 그는 그렇게 말했다. “허지만 묻지. 이름이 무엇이오?”
“저는…” 순간, 바보같이 내 현대 이름을 드러내는 상상을 했다가 배 위에서 흔들리는 물동이를 보듯 다잡았다. “하연입니다.”
그는 내 얼굴을 한 번 더 훑었다. 애틋한 것과 호기심이 섞인 눈이었다. 나는 내 입술이 떨리는 걸 참았다. 그가 고개를 아주 약간 끄덕였다.
“이하연. 이름이 좋소. 물처럼.”
물. 이 시대에서도, 내 이름은 그렇게 들릴까. 그의 눈동자 속에 작은 불씨가 켜졌다. 그러는 사이 주위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나장이 두 명, 부지런한 발소리로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들의 모자에 달린 작은 박쥐 장식이 흔들렸다. 나는 무심코 내 노리개를 만지려 했다. 더 이상 없었다. 그것은, 붉은 먹점과 함께,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고 사라진 것 같았다.
“도련님, 여기 계셨습니까.” 나장 중 한 명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금부 도사가 사람을 찾고 있사옵니다.”
도련님. 나는 숨을 들이켰다.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이 남자의 신분은 높다는 이야기였다. 남자는 나를 한번 돌아보았고,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 끄덕임이 부하들에게는 신호였다. 나장 둘은 주위를 잽싸게 훑었다. 나의 맨발과 젖은 옷자락을 보지 못한 척 해주었다. 남자는 내 손등을 살짝 잡아끌었다. 그의 손끝은 뜨겁고 단단했다. 그 열이 대책 없이 번졌다.
“이리 오시오.” 그는 낮게 말했다.
나는 그의 발 뒤꿈치를 따라 갔다. 밤, 낮게 깔린 초가지붕 아래로, 어둠은 종이처럼 얇아지고 두꺼워졌다. 토담이 파도처럼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 누군가의 잠들지 못한 호흡이 들렸다. 조선의 밤은 ‘깊다’라는 말로는 모자랐다. 내 숨소리와 그의 숨소리가 벽과 벽 사이로 번져나갔다.
“금부에서 오신 도사가, 뉘 집 도련님까지 번거롭게 했다 하더이다.” 나장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권언을 흘렸다.
“사람이 죽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는 두 눈시울이 저릿해졌다. 사람의 죽음이 여자에게 더 무섭게 들리는 이유는 언제나 비밀이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그 죽음을 피해 온 시간의 결이 아주 얇아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의 침묵, 족보의 붉은 점, 핀끝의 통증. 그것들이 벽돌처럼 차곡히 쌓이고 있었다. 여기가 내 산이 되기 위해.
사람들이 서성이는 공터에 닿았을 때, 남자는 손짓으로 나를 잠깐 물렸다. 작은 나무재로 만든 울타리 너머에는 젊은 사내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듯 했고, 입 모양도, 속삭임을 품은 채 굳어 있었다. 그의 옷자락에는 푸른빛의 또렷한 물기가 배어 있었다. 물. 이 밤, 나는 그 단어를 몇 번이나 생각하게 될까.
“물가에서 건졌답니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굵고 다부진. “목에는 끈 자국이 있고, 입에는 물이 들어찬 채로.”
나는 문득 허리가 꺾였다. 눈앞이 깜깜했다. 물 속에서 손 하나가 나를 잡아당기는 기분. 엄마가 상수도 물이 달라졌다고 투덜거리며 양치하던 작은 소리. 할머니의 마른 손. ‘첫딸은 물을 조심하라.’ 나는 혀를 세게 깨물었다. 살짝 철 맛이 올라왔다. 다행히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남자가 나를 힐끗 보고 말했다. “그만 보시오. 이 밤, 이런 건 약한 사람의 꿈에도 들지 않는 것이 좋소.”
“꿈이 아닌 것 같아요.” 내 입술이 먼저 움직였다.
남자의 시선이 내 입술 위로 흘렀다가, 내 눈과 마주쳤다. 그가 아주 미세하게 미소 지었다. “꿈이길 빌겠습니다.”
금부 도사라 불린 사내가 부지런히 이리저리 움직였다. 도포자락이 땅에 작은 선들을 남겼다. 분위기는 빠르게 얼어붙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차례로 불렸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살고 있던 시대의 이름과 이 밤의 이름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내 시대의 밤은 인공빛을 먹고 자라는 짐승 같았다면, 이 밤의 이름은 살아 있는 말의 옆모습 같았다. 얼굴이 있었다.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냄새가 있었다.
남자는 내 쪽으로 와서 내귀에 붙었다. 그의 숨이 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을 도망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소. 허나 자네 옷차림이 이 고을에선 눈에 띄오. 내 집으로 데려다줄 테니, 그리 아시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팔목을 감쌌다. 그의 손길은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아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두려운 일이었다. 누군가가 너무 쉽게 친밀해질 때, 그 사람은 이미 내 마음 어디쯤에 자리를 깔아놓기 마련이니까.
우리는 몇 차례 골목을 꺾었다. 밤의 골목은 늘 그랬다. 지나온 길인지, 가야 할 길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도승지의 집이란다, 갑자기 나타난 가마꾼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 시대의 지명을 몰랐지만, 그 말의 오만함에서 이 집이 얼마나 높은 곳과 가까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청마루에 오르자 나무바닥이 부드럽게 울었다. 내가 그 위를 걷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방 안에서 등잔불이 깜빡이며 기지개를 켰다. 나는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그리고 또.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 자주 숨을 삼키는 사람인가, 낯선 곳에만 오면 이토록 삼켜야 하는가.
그는 내게 작은 방 하나를 내주었다. 벽에는 먹으로 그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굵은 선 많이와, 가녀린 선 조금. 소나무의 등은 두껍고 충성스럽게 보였다. 방 한편에는 빗과 비녀가 놓여 있었고, 옷장이 반쯤 열려 부드러운 누비 저고리들이 숨 쉬고 있었다. 나는 내 손을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비녀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나무결이 매끈하고 고왔다. 그 안에 여자들의 손이 오래도록 닿아 있었을 것이다.
“입어보시오.” 그의 목소리가 문틈을 타고 들어왔다. 망설이다가 문을 조금 열었다. 그는 시선을 낮춰 섬세하게 내 표정을 살폈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데 타고난 능력을 가진 얼굴이었다. 아니, 그 얼굴 자체가 어떤 표지였다. ‘안전’이라는 이름의 표지.
나는 젖은 셔츠를 벗고 저고리를 걸쳤다. 솜은 가볍고 훈훈했다. 내 등 뒤에서 누군가가 서걱, 문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나는 빠르게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이름.” 내가 먼저 물었다. 이렇게까지 오는 동안,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바보 같았다.
그의 입술에 짧은 번민이 스쳤다. 왜일까.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망설임은 사람을 의심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이 어떤 책임감으로 단어를 고르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 말에 손을 얹고, 손등에 마음을 얹는다. 마지막에 입술로 봉인을 한다.
“이…” 그는 입술을 아주 딱 붙여 ‘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한 글자에서 갑자기 엉덩방아를 찧을 것 같은, 아주 심각하고도 멍청한 어지럼을 느꼈다. 이. 이씨. 내 족보의 맨 앞장.
“이현우라 하오.”
시간이 멈추었다. 진짜로, 아주 확실히, 누군가가 내 머리 뒤쪽에서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내 심장의 템포가 흐트러졌다. 분침이 분침을 쫓다가 서로 부딪힌다. 이, 현우. 나는 그 이름을 오늘만도 스무 번 넘게 입안에서 굴렸었다. 낯선 입맛이 들고, 다시 사라지고, 다시 피어나는 것을 확인하면서.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이 내 앞에 있다. 살아서, 숨 쉬며, 누군가의 도련님으로. 내가, 내가 죽이려는 사람.
내가 벽을 붙잡지 않았다면, 주저앉았을지도 모른다. 벽은 내 등을 살포시 받쳐주었다. 소나무의 굵은 선이 팔꿈치에 닿았다. 내 입 안에서, ‘할머니’라는 단어가 물에 젖은 나무처럼 무겁게 불어나고 있었다.
그가 내 표정을 살피며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이름이 무섭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는 동작이 어쩌면 너무 빨랐을지도 모른다. 거짓말처럼 보일 만큼. 사실 거짓말이었다. 이름이 무서웠다. 이름이야말로 그 사람보다 더 강력해야 할 때가 있지 않나. 이름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름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이름 때문에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고 결심하는 일도.
그는 내 입술을 잠깐 보았다가, 다시 내 눈으로 돌아왔다. “피곤할 것이오. 오늘은 푹 쉬시오. 그리고…” 그는 말을 잠깐 멈추었다. 등잔불이 그의 눈동자를 둥글게 감쌌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되겠소?”
나는 거의 자동적으로 대답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걸 상상했다. ‘하연’이라는 두 글자가 그의 입 안에서 뜨거운 차처럼 식혀지고, 다시 뜨거워지는 과정을. 잠깐 행복해져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순간의 행복.
“하연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 그가 부르는 그 한 번의 소리가, 거의 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뭉개트릴 만큼 달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려고 했다. 바보 같은 감상. 그러나 인간이 사랑할 때 가장 먼저 버리는 게 자신이 쌓아올린 논리라니, 나는 이미 논리아닌 논리의 계단을 폭삭 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돌아서려 할 때, 갑자기 창밖에서 긴 호흡 소리가 들렸다. 금부 도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대문을 두드렸다. 남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게 눈짓했다. 조용히. 그는 걸음을 몇 개 줄여 현관으로 나갔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 낮게 깔린 달빛 없는 어둠에서 말과 말이 부딪히고 갈라졌다.
“이도련.” 목소리의 주인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거기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동시에 더 큰 불안을 느꼈다. 이현우. 이도련. 하나의 이름 안에 두 개의 서로 다른 길이 있는 것 같았다.
“예, 무슨 일로요.” 그가 대답하는 목소리는 유연했고,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사람을 속이는 데 이보다 좋은 음색이 또 있을까. 나는 내 손가락을 꼬았다. 손톱이 손바닥 안쪽을 파고들었다. 팔꿈치가 소나무 그림의 고운 선을 조금 망가뜨렸다.
“죽은 자의 손에서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금부 도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이상한, 쇠붙이. 본 적이 없는 물건이오.”
“보여 주시지요.”
탁, 무언가가 나무 위에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내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건 스마트폰이 탁자 위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아니, 내게만 그렇게 들렸다. 설마. 설마.
“빌어먹을,” 내가 숨죽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 놓쳤던 것이, 노리개와 함께, 내 마른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내렸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제야 기억났다. 나는 황급히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내 가방은 없었다. 그러나 작은, 조금 전에 내가 벗어두었던 젖은 셔츠의 주머니 속에서 얇은 금속의 촉감이 꿈틀거렸다. 무의식처럼 나는 그곳으로 손을 넣었다. 살짝. 그리고 섬광처럼 번쩍 드는 공포. 내 손끝은 공기밖에 잡지 못했다.
대문 너머에서 금부 도사가 말했다. “들어 보시오. 참말로 하늘 아래 이런 소리가 나는 쇠붙이는 첨 들어보오.”
곧이어 들린 건, 내가 잃어버린 내 시간의 노래였다. 디아—딩. 디아—딩. 알람소리. 내가 평소엔 거의 듣지 못했던, 네 번째로 울리지 않던 그 노래.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눈물이 나올 뻔했다. 말도 안 되게, 우스운 순간에.
“이상한 기계로군요.” 이현우—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글도, 그림도 없는 듯한데, 소리를 내는 걸 보니 살짝 요사스럽기도 하고.”
그는 나를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말했고, 나를 들키고 싶어하는 사람처럼도 말했다. 나는 손등을 바라보았다. 핀으로 찌른 자리가 선명하지 않게 시큰거렸다. 그 시큰거림이 과거나 미래로 뻗어나갔다가, 다시 현재로 말려 들어왔다. “하연,”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나를 불렀다. 그것은 지금이냐, 아니면 미래의 그냐, 알 길이 없었다.
“도련님, 이 쇠붙이를, 내일 도감으로 가져가 살펴볼까 합니다.” 금부 도사가 덧붙였다.
“그리 하시지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만 들어가 주무십시오.”
숨소리가 흩어졌다. 문설주에서 물러나는 발소리. 복도 위에 남은 어둠과 말. 나는 방 안에서 가느다란 몸을, 대청마루 그림자에 접듯이 접었다. 내 일은 겨우 시작된 것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죽여야 하는 사람의 집에서, 하필이면 그가 내 이름을 조심스럽고도 친근하게 불러준 직후. 하필이면 여름처럼 좋은 손길과 겨울처럼 차가운 이름 사이. 하필이면.
문앞에 그의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나는 문짝이 움직이는 소리에 온몸이 반응하는 걸 느꼈다. 그는 문을 조금 열고, 고개만 안으로 들이밀었다. 눈동자에 등잔불이 한 겹 떠 있었다.
“하연.” 그의 목소리는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내 이름을 뱉었다. “내일 해가 뜨면, 함께 종로통을 거닐어 봅시다. 여인이 입을 옷도, 먹을 것도, 머물 곳도 마련해야지요.”
사소한 친절들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나왔다. “예.”
그가 미소 지었다. “날이 밝으면, 모레는 생각하지 맙시다. 오늘은 오늘만. 내일은 내일만.”
“모레는요?” 내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내겐 모레가 더 중요했으니까. 내가 그를 죽일 수도 있는 날이 모레일지도 모른다고, 아주 멍청하고 잔인한,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계산기를 내 머릿속 어딘가가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모레는… 글쎄, 모레의 나는 오늘의 나를 욕할지도. 그러나 지금은, 모레의 나까지 책임지기에는 네 마음이 너무 젖어 있소.”
내 마음이 젖어 있다는 말이 너무 정확해서, 나는 잠시 웃었고, 그 웃음은 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내가 담아두지 않으면 바로 넘쳐날 것 같은 눈물이 억울하게도 내 뒤통수를 눌렀다.
그가 문을 닫았다. 밤은 다시 깊어졌고, 등잔불은 소나무 그림 옆에서 작게 뛰었다. 나는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손이 갈 곳은 많았다. 쉽게 잡을 수 있는 것들. 비녀, 빗, 솜베개. 그러나 내 손은 갑자기 다른 곳을 향했다. 옷자락 속, 허리춤, 내가 이곳으로 올 때, 혹시나 해서 넣어두었던 작은 칼. 박쥐 노리개 대신 내게 남은 것은 이 칼뿐이었다. 얇고 반들거리는 칼놀음 한 번이면, 사람의 숨과 숨 사이를 가르는 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칼이 손에 닿자마자, 나는 그것이 얼마나 가벼운지에 소스라쳤다. 이 가벼움으로 인간의 무게를 재겠는가.
문밖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마치 누군가가 내 방 앞에서 발걸음을 뗐다 놓았다 하는 것처럼.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귀를 벽에 댔다. 나무 속에서 나무가 자라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인간 속에서 인간이 자라는 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 암흑에 떠오르는 건 오로지 그의 얼굴이었다. 높은 콧날, 매화 향 같은 미소, 은빛 기름 한 겹. 내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도 다정할 수 있음을, 나는 아직 믿을 수 없었다.
“하연.” 바람 같았다. 어찌 알았는지, 내 이름을 사람들은 자꾸 부른다. 나는 침묵으로 대답하는 법을 잘 몰랐다. 적어도 오늘은.
“예.” 대답이 입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듣지 못한 대답. 그러나 누구도 못 들었다고 해서, 그 대답이 거짓이 되는 건 아니다. 나는 내 대답을 들었다. 내 안의 칼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도.
밤이 흐르고, 등잔불이 낮아졌다가 꺼졌다. 내 심장도 낮아졌다가 컸다. 어느 순간, 내가 정말로, 아주 잠깐 잠들었다. 꿈에서, 나는 물 위를 걸었다. 물 위를 걸으면, 발이 젖지 않을 줄 알았다. 어째서인지, 물은 내 발바닥을 알아보고 내 발목을 감싸올랐다. 나는 웃었고, 그 웃음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시 떠오를지는 모르고.
아침이 왔다. 종로는 아직 종로라는 이름을 얻지 못했거나, 혹은 이름을 바꿨을 것이다. 상점들이 간단한 기침을 하며 문을 열었다. 행상들이 상품을 낭낭한 목소리로 불렀다. 남자는, 이현우는, 소박하게 그러나 아주 새것 같은 도포를 걸치고 내 앞에 섰다. 그의 눈동자는 낮보다 밤에 더 익숙한 사람의 그것 같았다. 나는 그 눈동자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고, 동시에 그의 눈동자 뒤의 그림자를 잘라내고 싶었다.
“준비가 되었소?”
나는 도포깃을 꽉 붙들었다. “예.” 내 목소리는 어제보다 덜 떨렸다. 삶이란, 어떤 때는, 다음 날이 찾아온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조금 덜 두려워진다.
우리는 마당을 건너 사랑채를 지나 대문을 나섰다. 마치 평범한, 아주 평범한 남녀처럼. 어제 죽은 자의 소식은 오늘도 살아 있는 자들의 장보기 사이를 어슬렁거렸다. 이현우는 어제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내 옆을 걸었다. 그의 발자국은 조용했고, 등을 담아 두른 도포자락은 물결처럼 흔들렸다. 나는 그 흔들림에, 아주 잠시, 손가락 끝을 갖다 대보았다. 옷자락의 결이 내 손끝으로 옮겨졌다.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내게 몸을 약간 돌렸다. “아, 말하지 않은 것이 있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말하는 방식은 늘 이렇게 한 박자 늦었고, 그래서 더 사람을 집중시키는 법이 있었다.
“내 자(字)는 자운이오.”
그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보이지 않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자운. 족보의 먹선이 내 눈앞에서 다시 흔들렸다. 박쥐 노리개의 작은 은날개가 빛났다. 어제 밤에도 알았던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늦게야 온전히 알게 되는가. 이름과 자가 같은 사람. 이현우, 자운. 내가 죽여야 하는 사람.
그의 눈맵시는 내 표정을 읽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이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하거나, 내 칼이 흔들림 없이 그의 숨에 닿을 수 없는 이유를 이미 아는 듯했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내 적은 내가 아니라, 내 적은 내 심장이라는 걸 그가 모른다면, 나는 그를 너무 일찍 너무 쉽게 미워할지도 모른다.
“자운이라니, 예쁘네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 진실을 조금씩 가려낸 말을 했다. 내 목소리가 내 귀에 익지 않았다. 이곳의 말투에 내 혀가 길들어 가는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얻을까. 내가 잃어야 할 것은 누군가의 삶이고, 내가 얻어야 할 것은 누군가의 죽음이다. 그 불균형에 내 두 다리가 벌써 후들거렸다.
그는 미소 지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문턱에서 보이는 미소였다. “고마우이.”
그 순간, 내 어깨 위에서 어떤 작은 비늘이 반짝였다. 어제 밤 없어졌던 줄 알았던 박쥐 노리개의 한 조각이, 내 도포깃 안쪽에서 조용히 떨어졌다. 나는 숨을 삼키고, 그 작은 은장식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내 손바닥에 닿은 금속의 차가움이, 아주 정확하게, 내 임무의 차가움과 겹쳤다. 그러나 동시에, 내 손바닥에 닿은 당신의 체온이, 아주 정확하게, 내 마음의 뜨거움과 겹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종로—아니, 이 시대의 거리—가 일렁였다. 사람들의 말은 모두 이야기였고, 이야기들은 모두 피와 물과 달과 바람의 합창 같았다. 내 이야기는 이제 겨우 첫 장의 첫 줄을 막 넘어섰다. 그러나 이미, 내 이야기의 후반부, 가장 어두운 문장들이 내 뒤통수에 걸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등에 소름이 서늘히 돋는 걸 느꼈다. 살과 살 사이로, 희미하게 칼이 지나가는 소리. 내 칼인가, 그의 칼인가, 아니면 누구의 칼도 아닌 시간의 칼인가.
“하연.” 그는 다시 나를 불렀다. 이번에는 아주 가볍고 길게. 나는 그 부름이 좋아 죽을 것 같았다. 참아야 했다.
“예, 자운.” 내가 그를 그렇게 불러 버렸다. 그가 아주 살짝 당황하는 눈빛을 지었고, 곧이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같이 걸었다. 아주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처럼. 아주 보통의 연인처럼. 아니, 아직은 아무것도 아닌. 아직은.
그러나, 내가 내 뱃속 깊은 곳에서 듣고 있던 그 저리는 울림은 말하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이 길 끝에서 나는 칼을 쥘 것이다. 그리고 그 칼끝이 가야 할 곳은 내 마음인지, 그의 심장인지, 아직 모르겠다고.
아침 햇살이 비닐처럼 얇게 길 위에 펼쳐졌다.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날도 살아 있을 것 같은 빛이었다. 어쩌면 살아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빛이기도 했다. 이현우, 자운. 당신의 이름은 내 입에서, 오늘 처음으로, 아주 선연하게, 피 맛이 났다.
나는 그 맛을 천천히 삼켰다. 그리고 걸었다. 그의 옆에서, 그의 반걸음 뒤에서, 혹은 그의 반걸음 앞에서. 오늘은 오늘만. 내일은 내일만. 그리고 모레는—모레는, 나와 칼과 사랑이 결정할 것이다. 그건 이 밤, 오직 내 이야기가 갖는 잔혹한 특권이었다. 그리고 죄였다.
다만, 어쩌면 그 죄가 곧 사랑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 몰랐다. 아니, 조금은 알았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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