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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매화 그늘 아래, 돌아갈 수 없는 밤
비틀린 인연의 학문처럼, 내 이름은 매번 혀끝에서 엉켰다. 이서윤. 다시 없을 오늘의 나였고, 내일이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나였다.
눈을 떴을 때, 바람은 냉기 가득했다. 한기는 단순히 겨울의 차가움이 아니라, 언어가 바뀌는 순간처럼 피부 위에 맺히는 낯섦이었다. 나는 오래된 꿈에서 본 소리들을 듣고 있었다. 장돌뱅이의 호객, 물지게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인분을 실은 수레의 나무 바퀴가 덜커덩 바닥을 긁는 소리. 저잣거리의 어질러진 풍경 속에서 나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쪼그린 채, 손끝으로 땅을 만지작거렸다. 흙은 습했고, 내 심장은 살아 있었다.
“...왔다.” 내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내 속을 정리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내 목소리조차 내가 낯설었다.
머리카락에 꽂아 놓은 은빛 비녀는, 앞서 칠흑 같은 새벽에 내 방에서 마지막으로 빛을 받아냈던 물건이었다. 외증조모의 외증조모, 더 멀리 올라가, 장대 같은 족보의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흐려지는 여인의 이름이, 그 비녀 끝의 새김처럼 흐렸다. 그 여인이 남겼다는 저주는, 우리 집안의 막내딸들이 스물여덟을 넘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고, 최근에 누운 시신의 이름은, 내 언니였다.
새벽마다 손바닥만 한 숭덩이의 공포가 목을 죄었다. 내가 숨을 쉴 때마다, 언니의 주검 위로 한겹씩 얹히는 내 이름. 그리고… 사진 속 웃는 얼굴들. 메신저 대화창에 남아 있는, 산만한,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분명하게 나를 붙드는 문장 하나.
없습니다 수 있냐 자기는 친구랑 뽀뽀 못한다고함 보자 ㅋㅋ
그 문장이 도착하던 밤, 나는 진심을 말하려고 했고, 혀가 굳어붙어 아무 말도 못했다. 저는 진심 얘기할 때 그때 뭐라고 말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너무 긴장해서 뭐라고 말했었는지, 준비한 말은 제대로 했는지, 반응은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랫동안 고민하고 말한 건데 걔들은… 그 문장들의 끝은 늘 끊겼다. 그때의 나는 도망쳤다. 손끝으로 휴대폰의 화면을 밀어 넘기며, 그날 밤을 수십 번 반복 거슬러 오르다가 결국 침묵으로 항복했다.
그 침묵의 맞은편에서, 언니는 숨을 멈췄다. 친구들은 흩어졌고, 어머니는 문 앞에 못질을 하듯 무거운 말들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입으로는 못한 것을, 이제는 칼끝으로 하겠다고.
“이경.” 나는 내 입술에서 끼어 나오는 그 이름을 아는 사람처럼 불렀다. “사헌부 정언 이경. 조선의 양반, 내 조상.”
신을 새로 신고 걷는 내 발은 삐끗거렸다. 내가 입은 옷은 손바느질이 성긴 사치도 검박도 아닌,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옷이었다. 준비하는 동안, 나는 옷감마다 숨을 묻혔고, 꿰멘 자리마다 망설임을 숨겼다. 도련님도 나으리도 아닌, 장터로 향하는 무명 여인처럼 보일 수 있을 만큼만.
강처럼 흘러내리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다. 소리들이 모든 방향에서 몰려들었다. 목줄을 잡고 닭을 팔아치는 손, 고지서가 적힌 종이를 등 뒤로 숨기는 장사꾼, 장난삼아 도망가는 아이, 발꿈치에 매달려 비녀를 보자고 떼쓰는 꼬마 애. 매화는 아직 피지 않았으나, 담 너머 나무 가지들이 정확히 어느 순간 꽃으로 폭발할지 짐작케 하는 부풀음이 있었다.
“거기, 색시!” 누군가가 불렀다. 나는 돌아봤다. 술에 얼큰히 취한 장정 둘이 나를 휘어잡듯 서 있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
나는 고개를 숙였으나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내 심장은 너무 빨랐다. 갈 곳이 있었다. 포덕골 입구의 큰 기와집. 그곳을 드나드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기록과 족보 속 한 줄로만 알고 있는 이름이, 정말로 살을 가지고 여기 존재하는지. 그를 찾아, 네 번 숨을 고르고, 다섯 번 눈을 감았다가 뜨고, 마지막으로, 칼을 빼는 연습을 했다. 비녀는, 말하자면, 나의 혀였다. 잘라야 할 문장이 하나 있었다.
“어라, 듣는 척도 않네.” 장정 하나가 내 소매를 잡아챘다. 나는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그의 손이 내 팔목을 쥐었다. 더 깊이, 내 피부를 압박했다. 찰나 동안 그 냄새—술과 간장과, 오래된 기름의 냄새—가 내 코를 훅 들이쳤다.
그때, 한 그림자가 내 앞에 떨어졌다. 검은 도포 자락이 내 눈앞을 스쳤고, 그 사이로 희고 말끔한 손가락이 장정의 손목을 덮으면서 부드럽지만 맹렬하게 지압을 눌렀다.
“손 치우시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 “여기서 소동을 내면 포도청 앞마당에서 다시 뵐 수도 있소.”
장정은 잠깐 짜증 섞인 웃음을 치켜올렸다. “나으리가 뉘시오?”
그가 대답하기 전에, 또 다른 손이 장정의 뒤통수를 툭 건드렸다. 이내 허리춤에서 군졸의 짧은 칼자루가 보였고, 곁에 선 또 다른 자가 바람처럼 움직여 장정의 등줄기를 꿰뚫는 눈길을 던졌다. 눈빛만으로도 퇴로를 막는 사람들. 나는 내 팔목에서 서서히 풀려나는 압박을 느꼈다.
“가세.” 도포 자락의 사내가 말했다. 그의 얼굴은 햇살이 닿은 물 표면처럼 잠깐 떨렸다가 또렷해지는 중이었다.
나는 입술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놀랄 만큼 차분했다. 눈동자에 가까운 회색빛이, 빛이 바뀔 때마다 갈처럼도 바다처럼도 보였다. 그는 장정 둘을 흘낏 보고, 군졸들에게 눈짓을 하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속이 보일 만큼 얇은 옷은 아닌데, 왜 이리 떨지?” 그가 내 어깨선을 지나 손목 쪽을 보았다. “피곤해 보이오.”
“괜… 괜찮습니다.” 나는 익숙하지 않은 높임말의 어조를 더듬었다가 삼켰다. 조선의 말은 내 입에서 서툴렀지만, 내 불안을 감추는 데에는 충분히 또렷했다.
그는 잠깐 미간을 좁혔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는 동안 내 숨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그가 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여인 혼자 길 가기엔 소란한 시각이오. 길목까지 데려다 드리리다.” 그가 말했다. 그는 나를 훑어보지 않았다. 나는 그게 더 낯설었다. 그의 눈빛은 한 발 앞쪽에 멈춰 있어, 내가 보다 안전한 쪽으로 발을 옮기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아니… 정녕 괜찮—” 나는 그 말의 끝을 내지 못했다. 내 뒤쪽에서 작은 놀람의 소리가 났고, 지나가던 아낙이 한숨을 쉬었다. “허, 세상에나. 어디서 이런 색시가…”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도포를 입은 사내는 이미 자신의 겉옷 자락을 내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갑작스리 뒤집어진 그늘이 내 어깨를 덮었다. 그의 향기가 아주 옅었다. 비누도 아니고, 풀도 아닌, 말리기 전 젖은 종이의 냄새. 손길은 예의 바르고, 행위는 완곡했다. 내가 어깨를 움츠리지 않으면, 굳이 닿을 필요가 없는 거리.
“이동, 이리.” 그가 동행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곁에는 장검을 찬 젊은 군졸과, 눈이 웃음으로 반달이 된 키 작은 사내가 함께 서 있었다. 그 웃는 눈의 사내가 먼저 가벼운 기침을 했다.
“나으리, 저잣거리 순찰 끝나면 바로 관아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안다.” 도포의 사내가 짧게 대답했다. “먼저 가 있게. 이리 볼일만 보고 뒤따라가마.”
그는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색시는.”
나는 숨을 골랐다. 포덕골. 내 입술은 그 이름을 말하려 했으나, 말하는 순간 그 길이 닫힐 것 같아서, 나는 약간 우회해서 말했다. “큰 기와집 쪽으로요.”
“아.” 아주 미세하게 그의 눈빛이 변했다. 호기심과 경계가 한 가닥씩 섞인 빛. “무슨 볼일이오?”
“사람을… 찾아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진실만을 말하고, 나머지는 감추는 것이 지금의 계획이었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길까지만 동행하리다.”
우리는 겨울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담벼락은 하얗게 석회를 먹고 있었고, 그 위로 누군가 말렸을 고추가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고추들이 서걱거리며 서로 부딪혔다. 내 어깨 위에서 그의 겉옷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나는 낯선 체온을 낯선 도시에서 빌려 입은 기분이 들었다.
“성은.” 그가 물었다. “성함을 묻는 무례를 용서하시오.”
나는 살짝 망설였다. 어떤 이름으로 살아야 할까. 내 이름을 거세했다가, 내 삶까지 증발하게 해버리게 될까. 그러나 나는 말했다. “이서… 은.” 마지막 음절이 미끄러졌다. 숨은 내 기도를 긁혔다. “이서은이요.”
그의 한쪽 눈썹이 반쯤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는 내가 입 모양을 바꿀 틈을 주지 않았다. “서은.” 그가 천천히 내 이름을 되뇌었다. “내 이름은 윤지운이라 하오. 포도청의 종사관이지.”
꼭 이 이름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의 이름은 욕지기로부터도, 겁으로부터도 멀었다. 바람이 잠깐 수그린 듯 잠잠해졌고, 내 발밑 흙먼지가 그의 이름 주위에서 한 순환을 이뤘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지운 나으리.”
그가 빗살 같은 웃음을 잠깐 지었다. “나으리라. 그 말은 참 공허해. 난 별로 나으리가 아닌데.” 그는 계속 걸으며 말했지만, 무엇이 되었든 그 말은 그의 몸을 살짝 흐트러뜨릴 뿐, 주된 균형을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이곳에 온 지 오래지 않소?”
나는 시선을 낮췄다. 내 발 얼마나 흔들리는지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네.”
“그렇겠지. 말투가 조금 다르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내 손등을 빠르게 훑고, 다시 앞을 보았다. “손톱에 흙이 들지 않았어. 서울 사는 색시들이 그러더군. 손끝이… 깨끗해.”
나는 무심코 내 손을 뒤로 감췄다. 그가 짓는 웃음은 어떤 의미도 덧씌우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저 관찰하고 있었고, 기록하고 있을 뿐. 마치 바람의 방향을 기록하는 사람처럼.
“없습니다 수 있냐, 라는 말을 들었지?” 내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현대의 파편이 튀어나왔다. “아, 아니, 그러니까…”
그의 걸음이 반박자 늦춰졌다. “무슨 말이오?”
“그냥.” 나는 두 손으로 내 코끝을 눌렀다. 바보 같은 말이었다. 이 시간의 공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파열음. “...그냥 생각났어요. 오래전 일이요.”
그는 묻지 않았다. 대신 앞쪽 골목 입구를 가리켰다. “저리로 나가면 큰 길이고, 그 끝에 말한 기와집 골목이 있소.” 그의 목소리는 어떤 자상함이 아니라, 업무상의 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거리감이 편안했다.
“감사—”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골목 어귀에서 가마 하나가 우쭐거리며 들어오고 있었고, 그 앞을 엿장수 셋이 허둥지둥 비켜섰다. 가마의 장막 사이로 슬쩍 보이는 손목. 그 손목의 옅은 반점 하나. 나는 등골이 싸늘해졌다.
“...저게.” 내 입에서 새어 나간 소리. 나는 내 발로 앞질러 나갔다.
윤지운이 잠깐 내 소매를 잡았다. “위험하다.” 그의 손끝이 살짝 내 팔꿈치를 눌렀다. 매끈한 주의와 단단한 경고가 섞였다. “가마는 함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오.”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본 초상화가, 만져본 족보의 잉크 자국이, 할머니의 목소리와 친척들의 서늘한 침묵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마가 멈췄을 때, 하인 둘이 앞을 치우며 외쳤을 때,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 발을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잠깐만요!” 내가 외쳤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조선의 말로, 예의를 갖추어 부르는 호칭으로는 도저히 이 급한 것을 붙들 수 없었다.
하인이 나를 밀쳤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땅이 휘청거리는 듯했을 때, 날 끌어당기는 손이 내 등 아래를 받쳤다. 윤지운이었다. 그는 나를 오른쪽으로 살짝 당겨 비켜서는 동시에, 가마 앞에 반 보 앞서 섰다.
“정지.”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권위로 더해져 있었다. “포도청 종사관 윤지운이다. 누가 타고 있느냐.”
가마 안에서 까마득히 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하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나으리, 저희 대감 나으리 모시는 길인데요. 급히 정자각으로…”
“대감?” 윤지운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포도청 사람들은 권세의 무게를 감으로 재는 데 능숙하다. 쇳덩이를 들어본 손처럼. “성함이.”
하인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굳은 담처럼 단단하지도, 달걀껍질처럼 얇지도 않은 침묵이 잠깐 흘렀다. 그 사이, 가마의 장막이 안쪽에서 가볍게 들렸다. 검은 매화 문양이 박힌 도포 자락이 보였고, 마치 바람을 흔드는 제비처럼, 실루엣이 움직였다. 그리고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입술선은 날카롭게 다듬어져 있었고, 눈매는 길었다. 눈동자에 서늘한 금빛이 도는 듯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장막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주 잠깐 우리를 훑어보았다. 내 심장은, 서늘하게, 환하게 울렸다. 그래. 족보의 글씨 위로 윤이 흐르던 얼굴. 부계의 초상화들이 닳아 문드러져도 남는 선들. 이경.
그가 말했다. “내가, 이경이다.”
그 짧은 문장을 듣는 순간, 내 주변으로 몰려오던 모든 소리들이 물속처럼 멀어졌다. 나는 그의 얼굴이 내 언니의 관 위에 떨어지던 무심한 먼지와 닮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너무 늦게, 너무 무심하게.
“사정이 있소.” 윤지운이 곁에서 말했다.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오.”
이경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서늘했고, 예의 바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포도청 종사관 나으리, 나를 아시오?”
“모릅니다.” 윤지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허나, 저 여인이 당신을 찾아왔소. 그리고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하오.”
이경의 시선이 내게로 왔다. 그 순간, 내 심장은 떨어져 나갈 듯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이 세계에서 내가 더 작아질 것 같았다. 이 세계는 이미 내게 낯설게 관대했고, 그 관대함은 기만이었다.
“내가.” 내 목소리는 돌아보니 다 타버린 나무처럼 갈라졌다. “당신을 찾아왔어요.”
이경의 미소가 아주 조금 기울었다. “그래서?”
“당신이…” 나는 한 번, 아주 깊게 숨을 쉬었다. 비녀의 무게가 내 뒷머리에서 갑자기 가벼워진 듯했다. “내가 죽이러 온 사람이니까.”
주위 공기가 술렁였다. 하인 하나가 칼을 꺼낼 듯 말 듯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윤지운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그 하인의 손등을 툭 쳤다. 동시에, 그의 또 다른 손이 내 팔을 아주 단단히 잡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 내 팔 안쪽에서 내 피가 여전히 뜨겁다는 걸, 그 온도로 알았다.
“서은.” 윤지운이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여기서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는 건—”
“함부로 내뱉는 말이 아니에요.” 나는 그의 손에서 팔을 빼지 않았다. 대신 내 몸을 약간 일으켜 이경과 눈높이를 맞췄다. “나으리. 조선의 한 남자. 후손에게 내린 저주를 모르는 남자.”
잠깐, 아주 찰나, 이경의 눈썹 사이에 금이 갔다. 그는 곧 미소를 회복했다. “저주는 무당들이나 하는 소리요.”
“그래요.” 나는 끄덕였다. “그럼 무당의 소리라도, 들어보세요.”
언젠가, 아주 오래전, 나는 메신저 채팅창에 마지막 줄을 보내지 못했다. 오늘은, 이 세계는, 나를 그런 식으로 침묵시키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내가 쓰러진다 해도, 내 말은 남아 있게 하고 싶었다.
“당신은 지금으로부터 몇 해 뒤, 어린 시녀 하나를 죽게 만들 거예요. 아마도 의도한 일은 아닐 거예요. 당신은 늘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하겠죠. 하지만 당신의 부주의, 당신의 무심함이, 한 사람을 죽이고, 그 여인의 언니를 미치게 만들며, 그 언니가 내리는 저주가, 내 언니를 죽였어요.”
침묵. 매화가 피기도 전인데, 내 말 한마디마다 매화 향이 끼어드는 것 같았다. 그 향은 달지 않았고, 떫었다. 익지 않은 과실처럼 혀를 죄었다.
윤지운의 손아귀가 조금만 더 단단해졌다. 그는 내 옆에서 아주 작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시선은 이경과 내 사이를 견고히 잇는 다리였다. 이경은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였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내 얼굴을 훑었다. 혐오도 연민도 없이, 단지 관찰자의 눈으로.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른다는 말인가.” 이경이 물었다.
“저질러요.”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서 나는—”
“그래서 죽이러 왔다?” 그의 말이 내 말을 밀어냈다. 그의 미소가 조금 넓어졌다. “여인이 참 대담하군.”
나는 대담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억지로 서 있었다. 다만, 내 발밑에 뿌리 하나라도 꽂아두고 싶었다. 그 뿌리 하나가 내 칼끝일지, 내 언어의 한 자일지, 아직 분간하지 못한 채.
윤지운이 입을 열었다. “말의 경중을 따져야 하오. 대감 나으리. 이런 소란을 빚게 한 건 내 책임이오. 다만, 이 여인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 있소.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오.”
그 말에, 이경은 아주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 올렸다. 그 찰나에 내게는 그의 눈빛이 아주 맑게 보였다. 맑음은 두려웠다. 어둡지 않은 악의는, 더 치명적이었다.
“좋소.” 이경이 말했다. “오늘은 관아로 가는 길이오. 일이 급하니, 긴 이야기를 할 수는 없구려.” 그의 시선이 내 비녀 끝을 한 번 훑었다. 예리한 시선이었다. “이틀 뒤, 해질녘. 남문 밖 은행나무 아래로 나오시오. 그때, 네 말이 진짜인지, 들어보겠소.”
하인들이 다시 가마를 들었다. 수레 같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마가 흔들리고, 이경의 얼굴이 장막 사이에서 사라졌다. 나는 내 입술이 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혀가 입천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느낌.
이경의 가마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윤지운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내 옆에서 조심스레 손을 놓았다. 아주 많은 것들을 놓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책임, 의무, 호기심, 그와 나 사이에 오가는 묶음들.
“서은.” 그가 말했다. “지금 네가 한 말은, 네 목숨을 허공에 던진 거나 다름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럼에도.” 그의 눈빛이 조금 낮아졌다. “네가 왜 이곳에 왔는지, 지금조차 설명되지 않소.”
“설명해 봐야 믿지 않겠죠.”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나으리는 믿을 수 있을까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문 밖 은행나무 아래에 나오지 마시오.”
내 심장이 꽂히는 소리. “왜요.”
“그는 장난으로 사람들 마음을 건드리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다.” 그의 화법은 단정했다. “네 말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미소 지을 것이다. 네가 그 미소의 의미를 다 읽지 못하면, 네가 그 날 저녁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럼.”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죠.”
윤지운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에는 무수한 가능성이 매달려 있었다. 포도청 종사관이 직무를 넘어 어떤 여인에게 내밀 수 있는 손의 길이와 무게, 그의 사사로운 양심과 공무의 경계, 그 틈새의 매운 바람. 그는 결국, 의외로 간단하게 말했다.
“내일 아침. 포도청 뒷문으로 오시오. 문지기에게 내 이름을 대면, 뒤뜰로 들일 것이오. 거기서, 내가 아는 만큼은, 말해 주리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햇빛이 기와에서 튕겨 그의 관자놀이를 빛냈다. 예리하고 고요한 눈. 긴장탓에 힘이 들어간 턱. 이런 얼굴들은 내 삶에서 본 적이 없다. 현대의 남자들은 다른 종류의 단단함과 다른 종류의 비겁함을 갖고 있었다. 그의 단단함은 이 세계의 것 같았고, 그의 비겁함(만약 있다면)은 그저 사람의 것 같았다.
“왜 도와줘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 같은 사람을.”
그는 잠깐 웃었다. “나으리라 불리지 않기 위해.” 그의 눈 한쪽 끝이 살짝 접혔다. “농담이오. 사실은… 글쎄. 아마도 나는 일이란 걸 싫어하지 않아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려고요?” 나는 쿵, 하고 내려앉는 마음을 달래려고 농담처럼 말했다.
“살아남는 법은 누구도 누구에게 알려줄 수 없소.” 그가 똑바로 내 눈을 보았다. “하지만, 함정의 위치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우리는 말없이 서 있었다. 사람들의 흐름은 어느새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몇몇은 우리를 힐끔거렸고, 몇몇은 아무 관심이 없었다. 내 어깨 위의 그의 겉옷은 아직 내 몸을 덮고 있었다. 나는 그걸 조심스럽게 벗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나는 말했다.
그는 받지 않았다. “가지시오. 오늘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으리의 옷을 입을 만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나는 그 옷을 그의 팔 위에 살짝 올려두었다. “그리고… 나는 내일, 포도청 뒷문으로 갈 거예요. 그러니, 내일 다시 빌려주세요.”
그는 그때 처음으로, 이 세계의 남자라는 사실을 정말로 미안해하는 사람처럼 웃었다. 미소 속에 조심스런 후회 같은 것과, 조금의 호기심과, 거의 보이지 않는 존경이 섞여 있었다.
“알겠소.” 그가 말했다. “서은.”
그는 떠났다. 군졸들과 함께, 바람과 소란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남아, 내 손끝이 다시 흙을 만지는 것을 보았다. 손톱 아래 어둠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흙은, 그래도 내 세계의 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냄새도, 감촉도, 나를 더럽히는 방식도.
나는 숨을 고르고, 발걸음을 옮겼다. 포덕골의 큰 기와집은 생각보다 훨씬 고요했다. 숭숭 뚫린 창살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고, 나는 담장 밖에서 오래 서성였다. 하인 하나가 문간에서 하품을 했다. 그의 손바닥엔 잿빛 굳은살이, 손등엔 미세한 칼자국이 난무했다. 사람들의 삶은 다 증거를 달고 있었다. 그 증거들을 읽을 수만 있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밤이 내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여관도, 친지의 집도 없었다. 나는 담장 옆에서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발등에는 아직 낮의 열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야에, 이경의 미소와 윤지운의 눈빛이 번갈아 떠올랐다. 한 얼굴은 내 칼끝으로 향해야 하고, 다른 얼굴은 내 칼을 막아설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잠깐 나를 잃었다.
언니. 나는 마음속으로 불렀다. 언니, 나 아직 네 이름 부르면 눈물이 나고, 네가 없는 집에서 숟가락을 하나 덜 놓는 게 너무 외로워. 내가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너를 되찾을 수 있을까. 내 이름을, 우리의 이름을, 저주라는 글자에서 지울 수 있을까.
아직 매화는 피지 않았다. 그러나 달빛이 담 위에 하얗게 매화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비녀를 뽑아 들었다. 비녀의 끝은 차가웠다. 나의 혀. 나의 칼. 오늘은 아무 것도 자르지 못했지만, 내일은 다를 것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그때, 문득 조금 떨어진 골목 모퉁이에서 낮은 휘파람이 들렸다. 나는 본능처럼 몸을 움츠렸다. 휘파람은 잠깐 멈추고, 다시 이어졌다. 박자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 합의된 신호처럼.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골목 쪽으로 돌렸다. 어둠과 어둠 사이, 그림자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굽은 등도, 지팡이도 없었다. 활처럼 곧은 등과, 내 기억의 맞은편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실루엣. 윤지운이었다.
“밤이 이렇게 빨리 오는군.” 그가 낮게 말했다. “네가 생각보다 성급하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웃음을 참았다. “나으리가 더 성급하세요.”
“그럴지도.” 그는 내 옆에 섰다. 높은 담에 기대며, 바람의 결을 잠깐 들었다. “잠잘 곳은 있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얇고 조촐한, 종이에 적힌 글자. 먹 냄새가 새삼스럽게 맡아지는, 사회의 관계들이 얽힌 작은 표식. “여관의 추천서요. 내 이름을 대면, 방 하나를 내줄 것이오. 공무로 인한 필요라는 쪽으로 적어놨소.”
“나으리.” 나는 그의 손에서 종이를 받는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히 말했죠. 나는 살인자가 되려고 왔어요.”
“그래서.” 그는 손을 뒤로 깍지꼈다. “내가 네 치마자락을 잡으려는 것이오.”
“왜요.”
“누군가의 칼이, 적어도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건, 포도청 사람으로서 욕심이오?” 그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으로서의 욕심이겠지.”
우리는 둘 다 침묵했다. 바람이 담 위에 쌓였다 내려오고, 멀리서 개가 두 번 짖었다. 하늘은 생각보다 낮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피어나기 전의 밤이었다.
“내일.”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일, 뒷문.”
“내일, 뒷문.” 그가 복창했다.
그는 내 앞에서 등을 돌리고, 두 걸음 걸었다가 멈췄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서은.”
“네.”
“네가 오늘 말한 진심. 그걸 끝까지 가지고 있어라.” 그는 아주 조용히 말했고, 그 조용함은 내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진심은 자주 엉키고, 제 발로 도망가고, 사람을 배신한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남는 건, 대개 그거더라.”
그 말은, 내가 메신저 창을 닫은 날 밤에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내 손바닥이 다시 뜨거워졌다. 나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그림자가 골목 끝에서 꺾여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뒤에, 나는 다시 비녀를 머리에 꽂았다. 밤의 공기가 내 목덜미를 차갑게 훑었다. 그리고 나는 여관을 찾아 종이를 쥐고 걸었다.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러나 방향은 확실했다.
매화는 아직 피지 않았다. 그러나 내 안의 무엇은, 막 피어나려고 했다. 피어나겠다는 결심만큼 잔혹한 건 없다는 걸, 나는 이제야 어렴풋이 알았다. 내일, 포도청 뒷문. 모레, 남문 밖 은행나무. 매화 그늘과 칼끝과, 미소와 진심 사이. 나는 그곳으로 가고 있었다. 돌아갈 수 없는 밤이었다. 돌아가지 않으려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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